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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약설(說)레어템 한의약으로 이세계 정복

등장인물 소개

한의사 유이태일생을 걸고 한의사가 되겠다는 목표로 정진하여 결국 젊은 나이에 유명한 한의사가 된 유이태. 운 좋게 재벌그룹의 사위 자리까지 꿰차게 되었지만, 어느 날 장인의 심부름으로 병원을 나서던 중 터무니없는 사고를 당하고 만다. 이후, 저승사자를 만나 그의 죽음이 급사, 객사, 요절, 미련과 억울함이란 조건을 충족하였다며, 지구가 아닌 이세계에서 잠시 생을 살 수 있도록 안내를 받는다. 우여곡절 끝에 집으로 귀환하게 된다.

부관 페퍼성기사단 ‘아이어맨(Ironmen)’ 군단의 부관. 흑인 여성. 전쟁에서 부상을 입었으나, 유이태의 도움으로 병상에서 일어나게 된다. 이후 유이태에게 점점 호감을 느껴 주변을 맴돈다. 유이태를 돕기 위해 전염병이 창궐한 도심에서 활약한다.

치들약재상. 유이태를 약재 시장에서 몰아내기 위해 계략을 꾸며 성공하였고, 그 결과 다시 시장의 지배자가 되었다. 전염병이 창궐하자마자 악성 재고를 시민들에게 영약이라며 속이며 판매한다.

박세아박명주의 장녀이자 유이태의 아내.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성격으로 고운 마음씨와 빼어난 미모를 지녔다. 식물인간 상태가 된 유이태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핀다.

장인 박명주국내 재벌 서열 10위 안에 드는 대부호. ‘대박’그룹의 회장. 막대한 부로 못 가진 것이 없었던 그였지만, 죽음은 두려웠던 탓에 한의학계에서 유망주로 소문난 유이태를 사위로 맞이하여 그에게 불로초를 연구하게 한다. 현재는 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된 유이태를 박세아 몰래 사망자로 처리하기 위해 애쓴다.

마지막 화. 스파이라도 괜찮아

전염병은 예고도 없이 찾아온 불청객처럼 조용히 수도를 덮쳤다. 인근의 도시나 마을이 전염병으로 피해를 봤다는 소식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왕국의 수도는 고열로 쓰러지는 사람들이 무더기로 속출했고 하루아침에 왕국의 모든 행정이 멈춰버리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웃을 수 있는 건 치들 뿐이었다. 치들의 약재상 앞으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군중

어서! 어서 청심환(淸心丸)을! 단약을 주시오!

치들

다들 진정하고 물러서시오.

치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자신의 키만 한 칼을 뽑아 들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치들의 종업원도 큰 칼을 들고 나타나 치들의 앞에 섰다. 치들은 천천히 칼끝으로 땅에 선을 그었다.

치들

약은 충분히 있으니 흥분하지 마시오. 흥분하여 다짜고짜 이 선을 넘어 들어온다면, 바로 목을 베어버릴 것이오. 다시 경고하지만, 이건 진심입니다. 우리 모두를 위한 극단적인 방법이지만, 약재는 충분하고 다 같이 살아날 방법은 있습니다. 그러니 밀고 들어오지 마시오. 그랬다간 차례대로 배를 찌르고, 목을 베고, 내 점포와 모든 약재마저 내 손으로 다 태워버릴 테니까.

군중

아, 알겠소! 물러서 있을 테니, 어서 단약을 내오시오!

치들

여러분들 지금 가족들이 전부 고열에 시달리고 피부가 검게 변하고 있죠?

군중들은 간절한 눈빛으로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크게 소리를 질렀고, 누군가는 오열하며 발을 구르기도 했다. 하지만, 치들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어갔다.

치들

다들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 이건 전염병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왕국에서 이처럼 강렬한 전염병이 창궐한 적이 없었죠. 모두 머나먼 낯선 땅에서 흘러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 역병은 청심환으로 다스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군중

그럼, 수가 없단 말이오?

치들

아니오, 제가 분명 약재는 충분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저 이번에는 청심환으로 치료할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 이 풀을 끓인 물을 마시고 상태가 호전된 이들만 청심환을 드시길 바랍니다.

말을 마친 치들은 종업원에게 턱짓했다. 사람들의 눈이 모두 종업원의 발끝을 따라갔다. 종업원은 금방 말린 약재 보따리를 짊어지고 나왔다. 양손에 짊어지고도 한 번에 옮기지 못할 양이라서 서너 차례를 들락날락했다. 치들은 그 모습을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모두 창고 안에서 썩어가던 악성 재고였다. 치들은 그런 악성 재고를 청심환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몽땅 팔아치웠다.

치들

‘적절한 가격을 불러야 의사 놈들에게 갈 생각을 안 하겠지. 그럼, 이제 의사 놈들에겐 청심환을 더 비싼 가격에 팔아볼까?’

치들은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유이태의 흔적을 지우는 데 시간이 제법 걸릴 줄 알았지만, 천운이 따라주어 순조롭게만 풀리니 말이다.

한편, 그 시각 왕궁은 쑥대밭이었다. 왕비가 쓰러진 것도 문제였는데, 전염병이 창궐했다는 소문에 귀족들은 이런저런 핑계로 입궁조차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간 왕족들의 질환을 유이태가 관리해주었던 탓에, 지금의 어의(御醫)들은 실력도 미진하였고, 경험도 부족하였다. 왕비를 비롯한 왕궁의 신하들을 모두 돌볼 만큼 여력이 되지 않았다. 누구도 차도를 보이지 않아 어의들은 진땀만 흘렸고, 급기야 소문만 듣고서는 확인해 보지도 않고 치들이 판매하고 있다는 약재까지 수배하게 되었다.

황제

아니, 어째서 누구 하나 차도를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하나같이 다 고열로 꿈쩍도 못 하고 있지 않느냐?

어의

병의 원인을 찾지 못한 상태라… 치료가 어렵습니다.

황제

그러고도 네가 이 나라의 치료사더냐? 이런… 정녕 힐러 허준만한 명의(名醫)가 없단 말인 게냐… 보아라, 나의 왕비가 힘들어하고 있다. 고열로 나와 왕자조차 알아보질 못하는구나. 누구든 좋으니 어서 왕비의 열을 내려다오!

왕비의 피부는 어느새 검게 변해가고 있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얼굴 위로 허리를 숙인 듯한 끔찍한 몰골, 고열로 정신을 잃고 헛소리를 늘어놓는 왕비를 보며 황제는 마음이 무너지고 말았다. 나이가 들어 왜소해진 어깨가 더욱 왜소해져 근엄함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황제가 왕비에게로 다가섰다.

어의

폐하! 아니 되옵니다. 전염성이 강한 역병입니다. 왕비님께 다가가셔서는 아니 되옵니다!

황제

원인도 모른다면서 전염이 될지, 안 될지를 네가 어찌 안단 말이냐! 저리 비켜라!

어의

고정하시옵소서!

어의를 비롯한 시종들이 황제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막아섰다. 그들은 전염병 차단을 위해 당장 어떤 방법을 써야 좋은 것인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환자와 접촉하는 건 그 자체로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건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로다주

로디 다니엘 주니어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때를 맞추어 로다주가 나타나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황제

짐은 자네의 알현을 허락한 적이 없네.

로다주

다급한 만큼 예를 다 갖추지 못한 것을 헤아려 주십시오. 이에 따른 벌은 일이 일단락될 때 반드시 달게 받겠나이다. 그보단 지금 왕궁 안팎으로 고열과 환각, 환청, 피부 괴사로 시달리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사옵니다. 그에 따라 정체불명의 역병에 걸린 민중들을 격리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여기에 계시기보단 집무실로 자리를 옮겨주셨으면 합니다.

황제

짐은 왕비 곁에 있겠네.

로다주

폐하, 부디 왕국의 백성들을 먼저 살피어 주시옵소서.

황제는 한동안 말없이 왕비를 바라보았다. 모든 신하가 숨죽여 황제의 다음 행동만을 기다렸다.

황제

교황은… 교황께선 이번 일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 교단에서는 아직 움직임이 없었나?

로다주

피부가 검게 변하는 것을 보고 악마의 소행이거나 타락한 마법사가 강력한 저주를 내린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교단 측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입니다. 제가 직접 성수를 환자들에게 먹이는 걸 지켜보았지만 별다른 변화가 없었습니다.

황제

그럼, 대체 어떤 얼간이가 왕국의 수도 한복판에 전염병을 몰고 왔단 말인가?

로다주

그게 누구인들, 이렇게 빠르게 전파시킬 수는 없습니다. 필시 누군가의 공작일 가능성이 큽니다. 신이 반드시 목숨을 걸고 배후 세력을 찾아내겠습니다!

황제

자네를 믿네. 그렇지만, 지금은 놈을 찾을 때가 아니지. 그래, 아니고말고. 그보단 먼저 내 아내를 살려주게. 내 아내를 살리고, 내 백성을 먼저 살려야지. 이미 저잣거리에선 병으로 몇 명 죽어 나갔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로다주

폐하… 죄송하지만, 제가 간언해 드릴 수 있는 건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황제

무엇이더냐?

그사이 더욱 초췌해진 황제가 힘을 잃은 눈동자로 로다주를 바라보았다. 로다주는 그런 황제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하였다.

로다주

힐러 허준을 옥에서 꺼내어 그로 하여금 질병을 다스리게 하소서. 그가 정말 적국과 내통을 했을지는 몰라도 지금까지 그가 의술을 행함에 있어 사람을 해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번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만이라도 그의 손을 쓰시길 바랍니다.

로다주의 말을 들은 황제는 잠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생각하기 싫은 많은 문제가 황제의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지나쳐갔다.

황제

그래, 죄인이라도 좋다, 역적이라도 좋다. 힐러 허준을 불러오라. 당장! 로디 다니엘 주니어여, 그렇지만 그대가 더 잘 알 것이다. 그를 옥에서 꺼내어 공적을 쌓게 한다고 한들, 이번 역병의 원인, 배후 세력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힐러 허준은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거라는 걸. 아니, 오히려 전부 그가 꾸민 일이었다는 말이 또 역병처럼 번질지도 모를 일이지… 그렇지 않은가?

황제의 말에 로다주는 그저 깊게 허리를 굽혀 보일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게 다 황제의 말 그대로였다. 유이태를 살리기 위해서는 여전히 명백한 증거, 물증이 필요했다.

한편, 박명주는 골치가 아팠다. 유이태의 담당의라는 작자가 말귀를 못 알아듣고 고집을 피우고 있었던 탓이다.

박명주

이미 사지를 다 쓰지도 못하고 뇌도 죽은 거나 다름없는 놈을 처리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는 말입니까? 의학적으로 뇌사 판정이 되면 사망선고가 가능한 게 아니오?

담당의

뇌사 상태와 최소 의식 상태(Minimal Conscious State)는 구별됩니다. 분명히 다른 상태란 말이죠. 유이태 환자는 지속적 식물 상태와 최소 의식 상태 사이에 있는, 살아있는 환자입니다. 신체 운동기능과 언어기능은 정상적이지가 않지만, 분명 생명유지 장치의 도움 없이 스스로 호흡하며 목숨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사망선고는 내릴 수가 없습니다.

박명주

환자의 가족들이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담당의

그건 문자 그대로 연명치료의 대상일 경우죠. 유이태 환자는 회복될 가능성이 있는 환자입니다. 그리고 치료 중단은 가족 중 한 분만 고집해서는 불가능합니다.

박명주

대체 뭐가 그리 뻣뻣한 게요? 벌써 저 상태로 있었던 게 몇 개월인지 알고도 하는 소리냐고!

담당의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1년이건, 10년이건, 원칙대로 하는 거죠. 유이태 환자는 스스로 호흡하고 있고, 생을 이어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정상으로 되돌아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아내 분이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고요.

나이를 먹었지만 여전히 덩치가 좋은 박명주는 가슴을 펴고 의사에게로 한발 다가섰다.

박명주

잘 들으시오. 내가 누군지 모르고 그렇게 구는 건 아닐 테고… 원칙. 그거 아주 좋은 거지. 그런데 나도 내 원칙이 있단 말이지. 바로 내 딸을 위해서, 우리 집안을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다는 게 내 원칙이오.

박명주는 담당의의 명찰과 얼굴을 여러 차례 번갈아 보고서는 그대로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지하 감옥에서 나온 유이태는 햇살에 눈이 부셔 제대로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게다가 감옥에서 풀려났다고는 해도 여전히 죄인의 몸이었다. 오른쪽 발목에는 족쇄가 채워져서 무거운 추가 달려 있었고, 두 팔도 쇠사슬에 칭칭 감긴 채였다. 발목과 손목에 모두 상처가 짓물러 걸음을 옮길 때마다 피가 배어 나왔다.

로다주

고생이 많군. 조금만 더 참게.

유이태

역병이라고?

로다주

그렇다네. 어젯밤부터 고열과 환청, 환각에 시달리는 환자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네.

유이태

사망자는?

로다주

정확한 수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왕궁 밖에서는 노인들 몇 명이 숨을 거두었단 소식을 접했네.

유이태

기저질환이 있거나 면역력이 약한 자들만 숨진 건가? 그럼, 아직 손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를 병이라는 소리군. 불행 중 다행이야. 그렇지만 뭔가 이상한데? 급성 전염병이라고 해도 하루아침에 같은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이 쏟아져 나오는 건 말이 되지 않아. 모든 병에는 잠복기가 있고, 사람들에겐 저마다 그 차이가 있단 말이지.

로다주

그래서 교단에서는 악마의 소행이라고 하더군. 극악무도한 저주라나?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유이태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고?

로다주

내가? 하하, 다른 세계도 있다는 마당에 악마라고 해서 못 믿을 건 없지. 뭐, 한 가지는 확실하다고 믿네. 악마든, 인간이든, 누군가는 분명 무슨 짓을 했다는 거야. 그러니 일이 이렇게 된 거겠지. 자네 말대로 매우 이상하지 않은가? 너무 인위적이야. 분명 배후가 있어. 그러니 몸조심하게. 이 모든 게 누군가를 끝장내기 위한 한 편의 연극일 수도 있으니까.

유이태

나 하나의 몸값이 그만큼이나 나간다고?

로다주

난 자네 한 명의 몸값이라고 단정 지은 적이 없다네.

말을 마친 로다주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단하게 굳어져 있었다. 유이태는 심호흡을 크게 내뱉고는 왕궁 내부로 발을 들여놓았다. 길게 뻗은 홀을 지나 내실로 향하는 동안 누구도 입을 떼지 않았다. 유이태가 입을 뗀 건 한참 후, 왕비의 침실 문이 열렸을 때였다. 그는 나지막하게, 그렇지만 명확하게 말을 뱉었다.

유이태

제기랄, 흑사병(黑死病)이다.

저승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공들인 프로젝트의 완성을 위해 각료들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신하1

그런데 이렇게 돌림병을 창궐하게 만들면 죄 없는 이들이 죽어 나가게 되는 거 아닙니까?

신하2

엄밀히 따지면 그렇지 않아요. 이미 그 세계의 시간을 걷고 있는 태반이 유이태 덕에 원래 정해진 수명보다 초과한 상태로 살고 있었으니까요.

신하3

그렇다고는 해도 원래 질병으로 죽을 팔자가 아니었는데, 돌림병으로 죽는 건 좀 너무한 처사이긴 합니다.

신하4

그래서 우선은 정해진 수명을 훌쩍 넘겨버린 노인들만 일부 데리고 오지 않았습니까? 다음은 또 지은 죄의 경중에 따라서 순차대로 데려올 테고요.

신하1

제법 합리적인 것처럼 들리긴 합니다만, 그 역시도 너무 인위적인 것 같네요.

신하2

뭐,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흐름을 깨고 무작위로 돌리는 건 대왕께서 지켜보시진 않을 테니까요.

신하3

그런데 누가 이렇게 잘 준비해 두신 겁니까? 정말 오랜만에 제가 칭찬을 아끼지 않으려고 합니다. 위급한 순간에 일을 갈무리할 단초를 남겨두다니 누군지는 몰라도 선견지명이 있으신 분이시군요!

신하4

하하, 아직 못 들으셨나 보군요. 사실 이건 우리 중 누군가가 한 게 아닙니다. 어리석은 인간이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판 거죠.

신하3

네? 인간이 꾸민 짓이라고요?

인간이 꾸민 짓이라는 말에, 모든 각료가 하던 짓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역병을 창궐하게 하다니, 우물에 독을 풀어버린 것만큼이나 사악한 짓이 아닌가? 그들 중 누구도 그 죄의 크기를 감히 가늠해 볼 생각을 못 했다. 한 인간의 잔인함이 태산도 찍어 누를 만큼 높은 죄를 쌓아 올렸으니, 필시 저승에 당도한다면, 그 영혼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한 채 억겁(億劫)을 견뎌야 할 터였다.

신하4

그렇다니까, 그 작자가 여기 와서 죄의 무게를 달아본다면, 그 자리에서 열두 번은 더 혀를 깨물고, 앉은 자리에서만 마흔 번도 더 미쳐버릴 테지. 암, 그렇고말고.

유이태의 손과 발을 묶은 사슬과 족쇄가 풀렸다. 며칠 만에 뜨거운 물에 몸을 씻고 나와서는 곧장 마스크를 대신해 천으로 입을 가리고서는 왕비 옆에 몸을 숙였다. 곧장 능숙하게 혈을 짚고 침을 꽂는가 싶더니 시종에게 약재를 구해올 것을 명했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유이태는 어의들에게 소독과 격리의 개념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하는가 싶더니 이내 곧 그들을 부려 수도의 취수원부터 폐쇄해 버렸다.

유이태

고생스럽더라도 물을 외부에서 길어 와야 합니다. 지금 이곳의 취수원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급한 대로 써야 한다면, 시민들에게 반드시 팔팔 끓인 후 마시거나 쓰라고 하세요. 그냥은 절대 안 됩니다. 먹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맨손으로 음식물을 집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끓인 물에 손을 씻은 후 식사를 하라고 하세요. 이를 어길 시에는 엄벌에 처한다고 알리세요. 그리고 지금부터 거리에 쥐가 보이면 어떻게든 태워죽이라고 하세요. 녀석들이 모인 곳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태우세요. 그러다 마을이 다 타버려도 상관없습니다. 사람들만 살아남을 수 있다면요!

유이태는 곧이어 대장장이를 불러 대량의 침을 주문하였다.

유이태

내가 지정한 규격대로 은을 사용해 대량으로 만들어 주시오. 돈은 얼마가 들든 관계없소. 황제 폐하가 다 지급해 줄 테니까.

다음으로는 이미 감염된 자들을 격리하고 분류하는 주문을 하였다.

유이태

피부색이 변한 이들과 아직 변하지 않은 이들을 따로 두시길 바랍니다. 병의 진행 정도에 따라 그들을 치료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의들은 얼굴과 손을 천으로 단단히 가린 후 환자들과 대면해 주셔야겠습니다. 그들에게 직접 문진(問診)해야 합니다. 고열만 호소한다면, 초기. 몸에 종기가 있거나 특정 부위 발열이 심하다면 중기, 피부색이 이미 변했다면 말기입니다.

어의들

그러다 우리도 감염되는 것은 아닙니까?

유이태

환자와 대면하고 진료를 감행하는 동안 쓴 천과 옷들은 격리구역을 벗어나서는 전부 태우세요. 그다음 한번 끓인 물로 손을 씻은 후 행동하신다면, 감염되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보다는 저의 집과 집무실을 압수 수색하면서 약재들을 다 치웠다고 들었습니다. 낭패군요. 지금부터 당장 은교산(銀翹散)과 마행감석탕(麻杏甘石湯), 황련해독탕(黃連解毒湯), 오미소독음(五味消毒飮), 그리고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과 생맥산(生脈散)을 대량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어의들

대체 그게 다 무슨 말입니까?

유이태

하… 언어와 약재가 다 뒤죽박죽이니 이럴 때 참 낭패군요!

정신을 가다듬은 유이태는 다시 종이와 펜을 꺼내 들어 약재들의 이름을 하나씩 써서는 왕국에 퍼져있는 약재들의 이름으로 고쳐 썼고, 다시 조제해야 할 약을 위해 약재들의 조합을 표기해 주었다. 그러는 동안 왕비의 피부색은 검은색에서 차차 붉은 빛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어의들

오! 왕비님의 혈색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습니다! 열도 조금 내렸습니다!

유이태

아직 방심할 수는 없습니다. 당장에는 응급처치 정도만 했으니까요. 우선 이곳은 제가 맡을 터이니 여러분들은 제가 지시한 내용대로 빨리 움직여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만 해주시면, 새벽부터는 제가 직접 환자들에게 침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유이태는 정말 그날 새벽에만 삼백여 명의 환자를 직접 돌보며 침을 놓았다.

치들은 왕궁에서 병사들과 치료사들이 내려와 감염자들을 격리하는 것을 보고서는 본능적으로 금고를 열었다. 분명, 떠날 시간이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시간.

이런 혼란 속에서 왕궁이 발 빠르게 대처한다는 건 뭔가 일이 잘못된 게 분명했다. 어쩌면 그가 팔아치운 악성 재고들이 정말 병에 들어맞는 약이었거나, 반대로 사람들의 죽음을 당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뭐가 어찌 되었든, 지금 상황은 그에게 유리할 게 없었다. 어차피 돌림병이 창궐한 도시 한복판에 있는 건 조금도 현명한 대처가 아니었기에, 어떤 미련도 없었다. 치들은 돈으로 두둑해진 가방 두 개만을 짊어지고서는 상점의 문을 닫고 나섰다.

페퍼

치들, 네 녀석도 떠나려고?

치들

돌림병이 창궐했으니, 일단은 도망가야지 않겠습니까? 당신도 잘 생각해 보세요. 황제 폐하에게 충성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게 우리 목숨보다 중요한지는 잘 모르겠네요.

페퍼

맞는 말이야. 목숨은 중요하지. 이럴 땐 사람이 없는 곳으로 피신했다가 일이 년 뒤에나 되돌아오는 게 현명할지도 몰라. 그런데 말이지, 자네는 그럴 수 없다네.

치들

네? 무슨 말씀이시죠? 아직도 그 죄인 때문에 제게 감정이 있으신 겁니까? 설마 이런 혼란을 틈타서 무고한 저를 해치시려고요?

페퍼

내가 기사가 아닌 평민이었다면, 이미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난 황제 폐하의 검이다. 폐하가 정하신 율법대로만 검을 휘두르지. 그 말은… 네 녀석은 감옥으로 끌려가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고.

치들

네? 대체 제가 무슨 죄를 지었다는 말씀입니까?

치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순간 그가 팔아치운 악성 재고가 떠올랐지만, 뒷덜미를 잡히기엔 너무 이르다. 분명,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목이 잡혔다.

페퍼

네 녀석의 창고에서 쥐가 들끓고 있더군. 유능한 치료사께서 말씀해 주셨어. 이번 돌림병은 분명 쥐 떼가 균을 옮겼을 거라고. 그리고 그건 누군가가 일부러 의도한 결과일 거라고 말이야. 듣자 하니 네 녀석은 오늘 아침에만 벌어들인 돈이 저택 하나를 지을 정도라고 하던데? 어떻게 치료사, 의사들보다 네 녀석이 돈을 더 벌 수 있었던 걸까? 이상하지 않아? 들끓는 쥐와 네 녀석의 돈주머니.

치들

그런 걸 우린 정황 증거라고 하죠. 물적 증거는 아니지 않습니까?

페퍼

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그런데 네가 며칠 전 밤에 가방 하나를 들고 취수원에 몰래 들어가는 걸 본 사람이 있다고 하더군.

치들

네? 제가요? 그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취수원에 갔다고요? 누가 그런 거짓말을 했단 말입니까? 이건 모함입니다!

페퍼

누구냐고? 자네도 잘 아는 사람이라네. 이미 우리가 다 같이 법정에서 본 적이 있었던 인물이지. 자네를 위해 증언해 주었던 '야야'라는 젊은이네.

치들은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한 번 배신했던 사람이 또 배신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것이 자신의 양심을 회복하는 길이라면, 오히려 선택이 훨씬 더 쉬웠으리라. 유이태에게 치료를 받아 병마를 이겨냈던 야야는 치들의 꾐에 넘어가 그만 유이태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야 했었다. 이후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차에, 로다주로부터 명령을 받은 페퍼가 야야를 찾아갔던 것이다.

페퍼

아마 치들에게 약점을 붙잡혔겠지. 아니면, 돈으로 입이 막혔거나. 어쨌거나 관계없어. 아마 네 녀석은 그날이 사건과 관련해서만 함구하겠노라고 맹세했을 테니까. 그렇다면, 이번에는 나와 똑같은 거래를 했으면 좋겠어. 어렵지 않아. 네 녀석이 이번에 ‘치들이 취수원에 검은 가방을 들고 들어가는 것을 봤다’라고만 증언한다면, 유이태 님을 살릴 수가 있어. 그렇게만 하면, 다른 어떤 거짓말도 더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말이야. 모든 게 다 제자리를 찾을 거야.

그렇게 나흘이 흘렀다. 유이태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직접 환자들에게 침을 놓았고, 탕약의 제조와 투여를 감독했다. 여전히 생소한 치료법에 어의들은 매번 당황했기에, 유이태는 마음 놓고 쉴 수가 없었다. 결국 나흘째 밤이 되자 면역력이 떨어진 유이태의 몸이 오한으로 떨려오기 시작했다. 감옥에서 나온 이후로 회복할 겨를도 없이 강행군을 한 탓이었다.

유이태

‘젠장, 내가 여기서 쓰러지면, 아직 치료받지 못한 이들도 명을 달리하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다시 전염병이 고개를 들고 창궐할지도 몰라!’

유이태는 서둘러 자신의 몸에 침을 놓고 탕약을 챙겼다. 금방 몸에 열이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몸 안에 들어온 균과 탕약, 유이태의 세포들이 전쟁을 치르기 시작했다. 오한으로 덜덜 떨고 있는 그에게 페퍼와 로다주가 찾아왔다.

로다주

자네, 괜찮은가? 안색이 좋지 않군. 어서 몸을 눕히고 쉬게나.

페퍼

그래요, 이제 다 마무리되었어요. 치들도 잡아넣었고요. 배후가 누구였는지는 밝혀내지 못했지만, 당장 화살이 당신에게로 날아들지는 못하게 만들었어요. 그 화살은 치들에게로 향할 테니까요.

로다주

그렇다네, 그러니 걱정하지 말게나. 당장에는 누구도 자네를 해하려 들지 않을 테니까. 왕비께서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네. 황제 폐하께서는 자네의 혐의를 더는 묻지 않기로 하셨어. 뭐, 직위를 돌려주지는 못하지만, 그게 어디인가?

페퍼

네, 그러니 어서 자리에 누우세요.

유이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야전 침상에 그대로 몸을 눕혔다.

유이태는 오래간만에 달콤한 꿈을 꾸었다. 날씨는 제법 무더웠지만, 관계없었다. 꿈속의 유이태는 예정대로 남방 지역에서 침향을 구해 기분이 극에 달해 있었다. 게다가 두 세계를 경험하며 지식을 섞어 연구하는 동안 떠오른 생각들이 정리되고 있었다. 이대로 눈을 뜬다면, 당장이라도 박명주가 바라던 씹어 먹는 불로초 환약을 만들 수도 있을 거 같았다. 그렇게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걸음을 옮기는 유이태 앞에 낯익은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 유이태를 멈춰 세웠다.

저승사자

자, 선생님. 이제 아내 분에게로 돌아가셔야죠.

유이태

아, 나의 아내. 세아. 맞아, 세아는 어떤가요? 건강한가요? 제 걱정을 많이 하느라 야위지는 않았나요?

저승사자

잘 아시는군요. 그러니 걸음을 서두릅시다.

유이태

잠깐만요, 선생님. 그럼, 이제 로다주와 페퍼는 볼 수 없는 겁니까? 야야도 만나고 싶군요. 대체 왜 그랬는지 물어보고 싶어요. 그 아이가 치들에게 무슨 약점을 잡혔던 것일까요?

저승사자

저런… 그새 정이 꽤 많이 들었나 보군요. 뭐,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이젠 다시 돌아가실 시간이거든요. 안타깝지만, 어쩔 수가 없겠네요. 하기야, 진짜 안타까운 건 페퍼 양이려나? 뭐, 선생님이 자리를 떠나시고 나면, 원래 육체의 주인이 정신을 차릴 테니, 페퍼 양이 그 양반에게도 마음이 동할지도 모르죠.

유이태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페퍼가 저를 좋아한다고요?

저승사자

눈치도 다 채셨으면서 그러신다, 하하하. 뭐, 여튼 그런 거랍니다. 야야도 신경 쓰이실 테고, 치들도 이후로 어찌 될지 신경 쓰이시겠죠. 이번 사건의 흑막들이 누군지, 대체 왜 전염병을 일으켰는지, 그들이 그렇게까지 하면서 얻으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한 것이 많을 겁니다. 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지만, 왕비마마의 허해진 기도 보충해 드리고 싶으실 테고요.

유이태

역시 잘 아시는군요. 다 맞는 말씀입니다.

저승사자

그런데 선생님, 이제는 다 잊으시길 바랍니다. 지금 눈뜨고 돌아가시면, 선생님 다니던 회사 자리에는 세상 물정 모르는 샌님이 한 명 앉아 있을 테고요. 그 샌님은 가당치도 않게 사모님에게 연정도 품으려고 하고 있다고요.

유이태

아, 그건 절대 안 될 말이죠!

저승사자

게다가 선생님의 장인어른도 여전히 쌩쌩하시고요. 그러니 돌아가셔서 할 일이 꽤 많으실 거란 말씀입니다. 뭐,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건 딱 여기까지입니다. 뭐, 티엠아이로 하나만 더 알려드릴까요?

유이태

네, 뭐든, 다, 궁금합니다. 이제는 저쪽으로는 돌아가지 못할 테니까요.

저승사자

아니, 티엠아이라고 했잖아요. 저쪽 말고, 이쪽이요. 선생 덕분에 이쪽에서는 프로젝트가 대성했다고 축제가 한창입니다. 게다가 우리 대왕님께서는 신하들 상대로 내기에서 이겨서 기분이 찢어지게 좋은 상태이시고요. 그래서 대왕님께서 선생님께 선물 하나 주신다고 하더군요.

유이태

선물이요? 그게 대체 뭡니까?

저승사자

이제 눈을 뜨고 나면, 페퍼고, 로다주고, 다 잊으실 겁니다. 그렇지만, 하나는 명확하게 떠오르실 겁니다. 두 세계에서 연구하며 찾아다니셨던 것. 그 약재의 조합. 선생님의 장인어른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줄 그 약재의 조합 공식 말입니다.

그게 꿈의 마지막이었다. 유이태는 처음 이세계로 떨어질 때처럼 다시 공처럼 몸이 구겨져 탄환처럼 쏘아졌다. 흐릿한 실내등과 음산하게 뿜어내는 가습기 소리.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따스한 손길. 유이태는 아내에게 자신도 영문을 모를 인사를 건넸다.

유이태

여보… 다녀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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