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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약설(說)레어템 한의약으로 이세계 정복

등장인물 소개

한의사 유이태일생을 걸고 한의사가 되겠다는 목표로 정진하여 결국 젊은 나이에 유명한 한의사가 된 유이태. 운 좋게 재벌그룹의 사위 자리까지 꿰차게 되었지만, 어느 날 장인의 심부름으로 병원을 나서던 중 터무니없는 사고를 당하고 만다. 이후, 저승사자를 만나 그의 죽음이 급사, 객사, 요절, 미련과 억울함이란 조건을 충족하였다며, 지구가 아닌 이세계에서 잠시 생을 살 수 있도록 안내를 받는다.

로디 다니엘 주니어성기사단 ‘아이어맨(Ironman)’ 군단의 대장. 적의 우두머리를 물리친 유이태에게 호감을 표하며, 유이태가 의술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

부관 페퍼성기사단 ‘아이어맨(Ironmen)’ 군단의 부관. 흑인 여성. 부상을 입어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채 막사에 몸을 눕히고 있다. 유이태의 도움으로 병상에서 일어나게 된다.

박세아박명주의 장녀이자 유이태의 아내.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성격으로 고운 마음씨와 빼어난 미모를 지녔다. 식물인간 상태가 된 유이태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핀다.

장인 박명주국내 재벌 서열 10위 안에 드는 대부호. ‘대박’그룹의 회장. 막대한 부로 못 가진 것이 없었던 그였지만, 죽음은 두려웠던 탓에 한의학계에서 유망주로 소문난 유이태를 사위로 맞이하여 그에게 불로초를 연구하게 한다.

저승 신하 1, 2, 3저승 세계를 관리하는 정책들을 제시하고 수정, 보완하는 책사들. 서로 의견일치가 잘되지 않는다. 단역.

염라대왕저승 세계의 지배자. 신하들의 매끄럽지 못한 일 처리에 늘 피곤하다. 일을 어렵게 대하는 신하들과 달리 매사를 쿨하고, 심플하게 처리한다.

Ep 3. 힐러 탄생

막사 안으로 들어선 유이태는 얼굴이 굳어버렸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페퍼의 왼쪽 어깨는 크게 부풀어 있었다. 지혈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던 탓인지 검붉은 덩어리가 그대로 말라붙어 있어 상처의 깊이를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유이태는 반사적으로 페퍼에게 다가가 맥을 짚었다.

페퍼

“그대가 마법사인가?”

유이태

‘어상맥(魚翔脈)에, 해삭맥(解索脈)인가? 십괴맥(十怪脈)이라니…. 이대로는 당장 요단강을 건너도 이상할 게 없다!'

로다주

“페퍼, 마음을 편히 먹게. 내가 자네를 위해 멀리 동방에서 모시고 온 고위 마법사라네. 이제 자리를 털고 일어날 일만 남았어.”

페퍼

“감사합니다, 장군.”

페퍼는 힘없이 대꾸한 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검은 피부에 주근깨가 덮인 얼굴이었지만, 로다주의 말대로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시원한 인상의 미인이었다. 다만, 지금은 창백해진 탓에 차가운 인상을 풍기고 있어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유이태

“쇠바늘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아주 가늘어야 합니다. 제법 많이 있어야 합니다.”

로다주

“가는 쇠바늘? 상처를 봉합하기 위해서인가? 마법사나 힐러들이 바늘로 사람 목숨을 구한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네만.”

유이태

“제가 지금부터 행하는 건 한의술입니다. 마법 같은 게 아닙니다. 하여튼, 최대한 빨리 구해주십시오. 부관을 아끼신다면 말이죠. 지금도 숨이 붙어 있는 게 기적입니다. 아니, 시간이 촉박하니 일단 상처를 봉합하는 데 쓰는 굵은 바늘은 있긴 하다는 거죠? 그거라도 우선 가져다 주십시오. 그리고 뜨거운 물과 무명으로 된 천이 필요합니다. 천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리고 제가 마셨던 술. 그건 많이 있습니까?”

로다주

“자세히는 몰라도 우리가 취할 만큼은 충분히 있을 거네.”

유이태

“좋습니다. 술도 한 병 가져다주십시오. 급한 대로 소독용으로 쓰겠습니다.”

로다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변의 병사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오래지 않아 바늘과 천, 술과 뜨거운 물이 차례대로 들어왔다.

유이태

“예상대로 천이 모자라는군요. 일단 면으로 된 건 뭐든 구해주세요.”

말을 마친 유이태는 상처 부위에 빠르게 바늘을 찔러 넣기 시작했다.

유이태

“먼저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 수양명대장경(手陽明大腸經), 족양명위경(足陽明胃經)을 자극하여 영기를 끌어올려줄 겁니다. 환자의 심신이 많이 약해진 상태라서 쉽지는 않을 겁니다.”

로다주

“자네, 아픈 자에게 뭐 하는 짓인가? 젠장! 바늘을 찔러 넣다니!”

평정심을 유지하던 로다주의 얼굴이 한순간에 구겨졌다. 게다가 살면서 처음 들어보는 기괴한 발음에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건 덤이었다. 반면 유이태는 침착하고 능숙하게 환자를 다룰 뿐.

유이태

"믿어주십시오.”

짧게 한 마디만을 남긴 유이태는 가까스로 굳어있던 환부를 다시 찢어냈다.

페퍼

“헉!”

유이태

“참으세요, 사혈(死血)을 뽑아내고 상처의 깊이를 정확히 알아보기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로다주는 고개를 돌렸다. 아끼는 부관이 고슴도치처럼 바늘이 꽂힌 채 벌어진 환부로 검붉은 피를 쏟아내는 모습이 여간 안타까운 게 아니었다. 유이태는 사혈을 뽑아내면서 조심스레 상처를 확인했다. 칼날이 어깨뼈까지 들어왔던 게 분명했다. 지금까지 살아있는 건 분명 천운이었다.

유이태

‘통증 반응을 보니 다행히 신경은 훼손되지 않은 것 같군. 그렇다면, 지금 고비만 잘 넘기면 된다!’

유이태는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한편, 유이태의 영혼을 다른 세계로 보낸 후 저승은 줄곧 소란스러웠다. 새로 도입된 프로젝트의 대상이 하필 유이태라서 염려했던 불안요소가 너무 빨리 터져버린 탓이었다. 그에 대해 저승의 신료들이 저마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떠드느(떠드는) 바람에 염라대왕은 골이 다 아팠다.

신하 1

“그러니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렇게 사무실에 앉아서 하는 생각들은 이상적일 수밖에 없다고요. 그가 도착하자마자 바로 나비효과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신하 2

“이상적이라고 품고만 있어서는 변화가 없지 않습니까?”

신하 3

“변화도 좋지요. 그런데 하필 그가 한의사였지 않습니까? 그럼, 일단 프로젝트를 뒤로 미루든지, 적용 대상을 바꾸든지, 아니면 생명체가 적은 곳으로 보내든지 했어야죠!”

신하 2

“하여튼, 프로젝트 파기는 말도 안 됩니다! 새로운 정책이다 보니 시행착오가 있는 건 당연한 겁니다. 사후세계라도 정당하게 굴러가야 인간들이 함부로 살지 않게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최소 십여 년은 진행해 봐야 정책 효과를 확인할 수 있어요.”

신하 1

“그게 말처럼 쉽습니까? 당장 대왕께서 보시는 명부가 실시간으로 바뀌고 있는데요?”

그때까지 신하들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염라대왕이 실시간으로 바뀌던 명부를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내던졌다. 아주 번거롭고, 귀찮다는 듯이.

염라대왕

“그래서 말인데, 너희 나랑 내기나 할까? 유이태 이 자식이 몇 명이나 살리는지 말이야? 너희가 이기면 내가 서왕모(西王母)의 천도복숭아 한 알씩 돌리고, 내가 이기면 너희 싹 다 관복 벗고 후배 저승사자들에게 자리 물려주는 거로. 어때? 콜?”

페퍼는 유이태의 정성스러운 치료 덕에 사흘 만에 스스로 몸을 일으킬 정도가 되었다. 창백했던 얼굴도 서서히 혈색이 돌기 시작하여 로다주의 얼굴에도 자연스레 미소가 피어올랐다. 다행히 그간 전투도 없었다. 우두머리를 잃은 괴물들은 한발 물러나 앞으로 나올 생각을 않고 있었다. 아이언맨 군단도 병력 손실이 큰 탓에 경계에만 정신을 쏟을 뿐, 상대를 자극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로다주

“서두를 거 없어. 이대로 계절만 변해도 우리가 유리해.”

정말 추운 계절을 기다리는 것인지, 페퍼의 완치를 바라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로다주는 그 이상 괴물들을 몰아세우지 않았다. 그보다는 유이태를 관찰하고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것에 훨씬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썼다.

로다주

“정말 신묘하군! 다 죽어가던 페퍼를 살리다니 말이야! 게다가 다른 부상병들도 다들 통증이 완화되고 있다니…. 이건 정말 꿈만 같은 일이군! 내가 궁으로 복귀만 하면 자네를 궁정마법사로 추천하겠네. 진심이야!”

유이태

“다시 말하지만, 마법 같은 게 아닙니다. 한의사가 한의술로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 건강을 다스리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것보단… 현실적으로 제게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로다주

“어떤 시간? 말해보게. 적극적으로 돕겠네. 아니, 그보다 자네 이름이 뭐였나? 이? 리? 리태? 류리태? 혀를 굴리기 꽤나 어렵고, 성가시군. 황제에게 보고하기엔 별로야. 멋들어지지 않아. 그보다 준은 어떤가? 유? 류? 류준~ 어떤가? 입에 착착 감기는 거 같지 않나?”

유이태

“먼저 이 땅의 약초들을 직접 다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터무니없이 오랜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죠. 그렇지만 알게 된다면 이 나라의 백성들은 물론이고, 이곳의 황제께서도 천수를 다 누리실 때까지 큰 병은 모조리 피해 가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름을 굳이 준으로 불러주시고 싶다면, <허 준>으로 하고 싶습니다.”

로다주

“허? 허준? 그래, 그게 좋겠어! 아무래도 그게 더 미지의 동방에서 온 듯한 이국적인 느낌이 나는군. 좋아! 앞으로 자네를 <힐러 허준>이라고 부르겠네!”

유이태

“감사합니다.”

유이태는 감히 허준이란 이름을 떠올린 스스로가 불경하게 생각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유쾌한 마음도 들었다. 자신의 입으로 허준의 이름을 들먹인 만큼 작정하고 제대로 의술을 펼쳐보겠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로다주

“그나저나 약초를 탐구하고 싶다고? 오호라, 알겠군. 알겠어.”

유이태는 간절한 마음으로 로다주의 얼굴을 살폈다. 약초들을 직접 다 조사해서 알고 싶다는 건 진심이었다. 기왕 허준의 이름까지 팔았으니 뭐든 부족함 없이 잘 해내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약초가 문제였다. 이곳의 풀은 확실히 지구의 것과는 달랐다. 생김새가 비슷해 보여도 맛과 향, 효능이 달랐다. 유이태는 이 문제를 페퍼를 치료하기 시작한 첫날부터 인지하고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원래대로였으면 병풀을 짓이겨서 페퍼의 상처를 돌봤을 터였다. 지혈과 항염에 우수한 병풀은 아시아 전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미나리과의 여러해살이풀이지만, 이곳에는 병풀이 없었다. 다행히 운 좋게도 유이태 몸의 원래 주인이 가진 기억 덕분인지 유사한 약초를 구할 수는 있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운에 불과했다. 유이태는 초조해졌다. 앞으로 고비를 넘긴 환자의 기력을 회복시켜주기 위해서는 탕약이 필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유이태는 지구에서처럼 자유롭게 탕약을 조제할 수 없는 것이다. 환경이 다르기에 모든 약재를 신중히 다루고 접근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런 갑갑함은 어디까지나 유이태만의 몫이었다. 속사정 따위는 알 리가 없는 로다주는 어째서인지 그저 빙긋빙긋 웃기만 할 뿐이었다.

로다주

“너무 빤히 보여서 내 입으로 말하기 민망할 정도군.”

유이태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로다주

“그럴싸한 말을 했지만, 뜯어보면 금방 알 수가 있지. 자네, 그냥 이대로 전역하고 싶다는 말이지 않은가? 칼날이 부딪히고 화살이 날아드는 전쟁터보다는 약초나 캐면서 은둔하고 싶다는 말 아닌가?”

유이태는 기가 차서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저 고개를 숙이기만 했다. 일단 군대를 떠나고 싶다는 건 부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얼떨결에 적장의 급소를 찔렀다고는 해도 유이태는 천성이 생명을 구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는 이였다. 결코 해하는 쪽이 아니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괴물들이라고 해도 저들의 죽음이 아무렇지도 않은 게 아니었다. 가능하다면 누구도 다치지 않고 평화로운 해결책을 찾았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유이태

“전쟁터가 달가운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죽어가는 이들을 두고 가볍게 발을 뗄 만큼 비정하거나 비겁하지도 않습니다. 약초와 약재를 학습하여 모두를 살리고 싶다는 건 진심이옵니다.”

로다주

“뭐, 아무려면 어떤가? 자네는 이미 자네의 조국도 아닌 이 나라를 위해 해준 게 너무나 많다네. 자네를 위해서 뭐든 적극적으로 돕겠다던 말도 거짓이 아니네. 다만, 나는 나라와 황제 폐하, 그리고 우리들의 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몸. 그래서 기왕이면 자네가 이곳의 테두리 안에서 호사를 누렸으면 한다네. 그러니 우선은 자네에게 필요한 책을 내리도록 하지.”

유이태는 책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그림으로 잘 갈무리된 도감이라면, 막막하게 그려지던 수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곳의 문자를 읽을 수는 있을까? 유이태의 머리가 다시 복잡해졌다. 그때, 로다주가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로다주

“자디스!”

로다주의 외침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찌르레기 한 마리가 날아 들어와 로다주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노랑머리를 하고 있어서 한눈에 보이는 특이한 녀석이었다.

유이태

‘저게 자디스라고? 설마… 자비스? 그 인공지능 로봇 자비스를 부르듯이 하려고 했던 건 아니겠지? 그래, 미치지 않고서야 새한테 심부름을 시키기야 하겠어?’

로다주

“어서 오너라, 귀여운 녀석. 이걸 황제 폐하에게 전해주고 오도록.”

작은 종이에 무언가를 급히 날려 쓴 로다주가 그걸 곱게 접어 자디스의 발목에 질끈 동여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유이태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유이태

‘미치겠군! 이러다 정말 쫄쫄이 타이즈 입은 히어로들을 다 만날 기세야… 아니, 새보다는 파발을 보내도 되지 않나? 그 이전에 보통 저런 전서구는 무난한 색상에 말 잘 듣는 비둘기로 조련하는 거 아니었어?’

로다주

“어때, 멋지지 않은가? 자디스는 내가 직접 조련한 녀석이야. 밀서를 주고받는 것부터 모닝콜이나 손님맞이 등 여러 잡다한 일들을 다 해준다네. 마치…”

유이태

“집사요?”

로다주

“그래, 맞아. 넋 놓고 사는 어지간한 집사들보다도 훨씬 유능한 녀석이야.”

유이태

“아무렴요….”

그렇게 자디스가 날아가고 나흘이 되지 않았을 때, 유이태는 두터운 도감을 하사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페퍼는 어색하게나마 팔을 들어 올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로다주

“오래 기다렸군. 이제 놈들을 소탕할 때가 되었어.”

칼을 뽑아 든 로다주와 염라대왕 덕에 겨우 진정된 저승의 회의실을 가로질러 지구로 돌아가 보자. 그곳에는 조용히 숨만 쉬고 있는 남편 옆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박세아가 있다. 세아는 남편의 영혼이 다른 세계 어딘가에서 맹활약 중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슬픔에 잠겨있었다. 이미 유이태의 육신은 한 달 넘게 병상에만 누워 있었던 탓에 뻣뻣하게 굳어가는 중이었다. 세아는 직접 유이태의 몸 구석구석을 주물렀고, 욕창이라도 생길까 봐 부지런히 몸을 돌려주었다.

박명주

“아직도 여기서 그러고 있는 게냐? 사람을 써서 붙여두었는데도….”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는지 박명주가 혀를 끌끌 차며 세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박세아

“아빠, 왔어? 내 남편인데, 다른 사람 손에 어떻게 맡기고만 있어.”

박명주

“몸도 자기 의지대로 가누지 못하는 놈을 특실에 데려다 두고 사람 붙여두었으면 된 게야. 이 애비는 이러다 네가 병이라도 날까 무섭구나.”

박세아

“걱정 마, 난 아빠 닮아서 튼튼하니까, 호호.”

박명주

“유서방이 자리에 드러누운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어가고 있구나. 나보다는 매일 주무르고 있는 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 녀석의 근육이 빠져나가고 있는 것 말이다.”

박세아

“….”

박명주

“듣자 하니 의식이 돌아오기 전에 대부분 근육이 먼저 다 빠지고, 다음으로 간이 박살 난다더구나. 목숨 붙잡아두자고 약물을 자꾸 쓰니 간이 축나는 게지.”

세아의 입술과 눈두덩이가 경련으로 파르르 떨렸다. 반면, 박명주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오히려 더 꼿꼿한 자세로 한심하다는 듯이 자리에 누운 유이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박세아

“아니, 아빠… 대체 저한테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데요? 다시 일어날 사람 앞에 두고 무슨 말씀이시냐고요?”

박명주

“현실을 잘 생각해 보라는 말이다. 이대로는 깨어나더라도 재활에만 또 몇 년을 갖다 부어야 할 텐데. 그럼, 그게 어디 사람 사는 모습이겠냐? 돈은 아깝지 않다. 한 달 병원비만 하더라도 어지간한 사람들 몇몇의 급여를 끌어모은 정도로 나온다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관계없다는 말이다. 내가 걱정인 건 이런 녀석에게 매달려서 네 청춘이 다 저버릴까 그게 걱정이구나.”

결국 세아는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박명주는 딸에게 다가가 어깨를 끌어안고 다독여주었다.

박명주

“그래, 그래, 지금 실컷 울어버리자. 그리고 다시 날이 밝으면 이야기하자꾸나.”

세아는 흐느끼면서 자신은 따로 더 할 이야기가 없다고 말했지만, 그 말은 결국 박명주에게 닿지 못했다. 이미 마음이 무너져서 눈물도 범람하고 말았던 것이다. 박명주는 그런 세아를 두고 병실 문을 나섰다. 마지막까지 유이태의 육신을 한심하다는 듯이 내려다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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