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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약설(說)레어템 한의약으로 이세계 정복

등장인물 소개

한의사 유이태일생을 걸고 한의사가 되겠다는 목표로 정진하여 결국 젊은 나이에 유명한 한의사가 된 유이태. 운 좋게 재벌그룹의 사위 자리까지 꿰차게 되었지만, 어느 날 장인의 심부름으로 병원을 나서던 중 터무니없는 사고를 당하고 만다. 이후, 저승사자를 만나 그의 죽음이 급사, 객사, 요절, 미련과 억울함이란 조건을 충족하였다며, 지구가 아닌 이세계에서 잠시 생을 살 수 있도록 안내를 받는다.

부관 페퍼성기사단 ‘아이어맨(Ironmen)’ 군단의 부관. 흑인 여성. 부상을 입어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채 막사에 몸을 눕히고 있다. 유이태의 도움으로 병상에서 일어나게 된다.

치들약재상. 유이태로부터 청심환을 받아서 팔게 된다. 유이태가 등장하기 전까지 시장을 지배하던 자였지만, 이젠 유이태의 청심환으로만 수익을 내고 있는 처지다. 당장 돈이 되더라도 유이태의 존재가 그리 달갑지 않다.

박세아박명주의 장녀이자 유이태의 아내.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성격으로 고운 마음씨와 빼어난 미모를 지녔다. 식물인간 상태가 된 유이태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핀다.

장인 박명주국내 재벌 서열 10위 안에 드는 대부호. ‘대박’그룹의 회장. 막대한 부로 못 가진 것이 없었던 그였지만, 죽음은 두려웠던 탓에 한의학계에서 유망주로 소문난 유이태를 사위로 맞이하여 그에게 불로초를 연구하게 한다.

이주호평생 책상 앞에서 공부만 하고 살아온 생물학자. 박명주의 부름에 응해 저녁 식사에 초대받는다.

Ep 7. 대한민국이 어디야?

유이태는 남쪽을 향해 말을 달렸다. 말이 지칠 때까지 꼬박 닷새는 달려야 항구에 이를 예정이다. 가슴팍으로 밀려드는 모래바람에 유이태는 눈을 찌푸렸다. 멀리서 불어온 건조한 바람이 그의 얼굴과 품 구석구석에 고운 모래와 함께 스며들었다. 숲과 평원을 지나 사막으로 접어드는 길목이었다.

유이태

'항구까지 가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구나.'

유이태는 잠시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새벽부터 말을 탄 탓에 사타구니 통증은 말할 것 없고, 허벅지 안쪽은 살이 쓸려 조금만 움직여도 쓰라렸다. 유이태는 그늘에서 말을 쉬게 했다. 사막으로 접어들기 전 마지막 그늘임이 분명했다. 유이태는 웃옷을 벗고 연고 하나를 꺼내 들었다. 최근에 발명한 자황고(紫黃膏)였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서는 바지까지 풀어 내렸다. 허벅지 안쪽으로 벌겋게 살이 쓸린 부위가 드러났다. 유이태는 연고를 한 움큼 퍼서는 거침없이 환부에 발랐다.

유이태

으아아악!

찢어진 상처에 알코올을 통째로 들이부은 것 같은 맹렬한 따가움과 쓰라림이 유이태를 덮쳤다. 유이태는 고통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약효가 제대로 듣고 있다는 사실에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유이태가 페퍼와 함께했던 전쟁터에서부터 열을 올리며 찾아다녔던 약초가 자초(紫草)였다. 두 세계가 비슷한 부분이 많은 만큼 약초도 예외가 아니었다. 비슷한 효능의 약재가 매우 많았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그 각각의 생김새가 다른 경우가 많았던 탓에 유이태는 한동안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자초의 경우에는 외상(外傷)에 사용되는 필수 약재와 다름이 없었는데, 좀처럼 그것과 같은 효능을 내는 대용품을 구하지 못했다. 게다가 자초만으로는 그 쓰임이 온전할 수가 없고, 참기름, 당귀, 자금, 밀랍, 돈지, 감초, 백선피, 백지, 황련, 황백 등의 재료가 추가로 있어야 했고, 특히 자황고를 만들기 위해서는 거기에 유황과 용뇌박하뇌까지 추가로 첨가해야 했으므로, 기본적으로 확인하고 확보해야 할 약재의 수만 해도 이미 엄청났다.

유이태

'아이고, 죽을 맛이로구나! 그래도 생각했던 대로 약 조합이 맞아서 다행이야. 이대로 상처가 깔끔하게 아무는 게 확인된다면, 이제 돌아갔을 때 외상 치료제도 함께 판매할 수 있겠어.'

유이태가 등장하기 전까지 치들이 수도에서 유통하고 있던 약초들은 외상치료와는 조금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염증 완화에는 얼마간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근본적으로 피부를 아물게 해줄 만큼의 효능은 없었다. 그러니 유이태가 신의(神醫)로 이름을 떨치게 된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직접 약을 바른 환부가 곧이어 후끈하게 달아오르는 듯하더니 이내 파스를 바른 것처럼 시원한 기운이 감돌았다. 유이태는 만족스러운 듯이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유이태

'그래, 청심환과 자황고만 있어도 이 세계에서는 쉽게 돈을 벌 수 있어. 여기에는 여태껏 제대로 된 좋은 약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많은 이들이 허망하게 세상과 작별했던 거지. 그러니 난 단순히 내 지식을 팔아서 돈만 벌고 있는 게 아니야. 무려 세상을 이롭게 만들고 있는 게지. 정말, 아쉽구나. 내가 원래 살던 세계에서도 이처럼 보람을 느끼며 일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어?'

유이태는 고개를 들어 먼 곳에 펼쳐진 모래 바다를 바라보았다. 항구는 저 사막을 건너야만 만날 수 있었다. 모래를 싣고 불어오는 바람 앞에서 유이태는 새삼 스스로 견뎌왔던 지난 시절들이 덧없게 느껴졌다. 유이태는 기운이 떨어져 일어나고픈 의욕조차 없었지만 겨우 몸을 일으켜 말 궁둥이 위에 걸려있던 솥을 내렸다. 일찌감치 밥이나 먹고 누워서 쉴 생각이었다. 그렇게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솥을 걸고 불을 피웠을 때였다.

두두두두두.

바닥이 울릴 정도의 굉음이 들려왔다. 한 무리의 말 떼가 내달리는 소리였다. 유이태는 손을 들어 이마 쪽으로 쏟아지는 빛을 가렸다. 멀리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군마가 보였다. 틀림없이 수도의 병사들이었다. 유이태는 본능적으로 등을 돌려 반대편 지평선을 확인했다. 적지 않은 병사들이 보인다는 건 어쩌면 인근에 대치 중인 다른 나라의 군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다행히 반대편은 그저 황량했다. 두두두, 말발굽 소리는 그새 더욱 가까워졌다. 유이태는 빛을 가렸던 손을 내려 코와 입을 가렸다. 뿌연 흙먼지가 하늘을 덮고 있었다.

목소리

역적, 허준은 당장 투항하라!

유이태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유이태

내가? 역적이라고?

유이태를 압송하기 위해 병사들이 움직인 건 치들 때문이었다. 치들이 페퍼를 찾아가 그녀의 정신을 흔들었기 때문이었고, 치들의 말에 정신이 흔들린 페퍼가 다시 로다주에게 검증되지 않은 의혹들로 만들어진 불완전한 정보를 알린 탓이다. 평소 충실했던 페퍼의 말이었기에 로다주 역시 의심스러운 정황들이 다분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를 알현하게 되었다.

황제

뭐라고, 첩자?

로다주

네, 첩자로 의심되는 정황들이 꽤 있습니다.

황제

그가 대체 뭐가 아쉬워서? 그는 이미 제국의 신의로 이름을 날리고 있지 않은가?

로다주

저도 그저 그를 음해하는 자들이 만든 헛소문이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가 이름을 날리는 만큼 환자를 많이 돌보지 않는 것도 사실이죠.

황제

그건 그렇지. 대신 그는 이 나라, 아니, 이 대륙 전체에서 보지 못했던 신약들을 보여주었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오지 않았나?

로다주

저 역시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데, 그런 이유로 현재는 그가 신약의 유통망을 독점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황제

그래, 그건 매우 불쾌하고 곤란한 점이긴 해. 제조 방법을 공유해주진 않고 물량 공급을 독점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그래도 매번 필요한 만큼 생산은 해주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짐에게는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네. 처음부터 그에게 그만큼의 권한을 준 건 짐이었지.

로다주

저 역시도 이제는 그의 친우입니다. 또한 용맹한 저의 부관을 구해주기도 했습니다. 전장에서 기력을 다해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들리는 모든 소문이 그저 모함이길 간절히 바랍니다..

말을 이어가고 있는 로다주의 손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진정으로 유이태를 아끼고 있었다. 그러니 황제에게 이런 보고를 하는 것 자체가 못마땅했지만, 의심스러운 부분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 그는 이제 황궁의 그 누구보다도 황제에게 신임받는 이였고, 많은 귀족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유이태는 실제 입지가 단단해진 만큼 한낱 풍문에도 자신의 존재는 위태롭게 흔들렸다.

황제

그렇다면, 흘려들어도 되지 않겠나?

로다주

그러기에는 무시 못 할 증언과 정황이 있어서요. 아무래도 직접 불러놓고 확인을 해봐야겠습니다.

황제

괜한 짓 같다만….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들어는 봐야겠지.

로다주

폐하, 가장 최근에 지도를 완성한 자들이 그러더군요. 동방에는 분명 무수히 많은 크고 작은 나라들이 있지만,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없었다고요.

황제

뭐라?

로다주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그는 자신의 신분을 속인 것 같습니다.

황제의 미간이 크게 구겨졌다. 그의 손에 쥐어진 비단 옷자락도 구겨졌고, 그의 믿음도 따라서 구겨졌다. 유이태가 없는 자리에서 유이태의 입지가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황제

음…. 그래도 짐은 그를 믿네. 뭐, 그럼, 확인을 위해서 그를 불러오도록 하게.

로다주

그는 현재 수도에 없습니다.

황제

뭐야? 아니, 또 약초라도 캐러 간 거 아닌가? 기껏 해봐야 인근의 숲이나 평원까지 갔겠지.

로다주

아닙니다. 그는 지금 바다를 건너기 위해 남쪽 항구로 향하는 중입니다.

황제

뭐? 바다를 건너?

드디어 황제의 마음에도 불신이 자리를 잡았다. 불신은 마음에 싹을 틔우며 황제의 모든 밝은 감정을 잡아먹고, 어두운 감정들을 자극했다. 황제의 눈이 커졌고, 눈알은 금세 붉게 충혈되었다.

황제

당장 항구를 봉쇄하라! 아니, 전국에 수배를 내려!

로다주

그리고 그의 침대 밑에 이슬로프어로 적힌 여러 서신과 책이 발견되었습니다.

로다주의 얼굴도 창백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시종을 불렀다. 그러자 뒤에서 대기하던 시종 둘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상자 안에는 이슬로프어로 적힌 문서와 서신, 책들로 가득했다.

황제

이슬로프? 그럼, 그가 이슬로프에서 보낸 첩자였단 말인가?

로다주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약속된 날이 되자 이주호의 연구실 앞으로 검은색 세단이 정차했다. 운동이라곤 전혀 해보지 않은 그는 빌려온 골프채를 차에 실었다. 그렇게 차에 오른 그는 곧이어 박명주 회장의 전용기에 올랐다.

이주호

어디 멀리 가는 겁니까?

박명주

아니, 태국까지만 가지. 아무래도 국내는 너무 보는 눈들이 많고, 그렇다고 더 멀리 가기엔 시간이 촉박하니까. 딱 오늘 하루만 즐기고, 또 몇 달은 일에만 집중해 보세.

그렇게 퍼팅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이주호가 시암 컨트리클럽 올드 코스를 돌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는 자신의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대체 박명주 회장은 왜 자신을 데리고 골프를 치려는 것일까? 그것도 먼 거리를 비행하면서까지? 반면, 박명주는 지금의 상황이 모두 의도한 대로 진행되고 있어서 매우 만족스러웠다. 일단 어리숙한 이주호와 세아를 한 자리에 둘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것도 꽤 먼 거리를 왕복하는 동안, 긴 골프 코스를 도는 동안, 적절하게 통제된 상황에서 줄곧 함께 있어야 할 터였다.

박명주

아, 참. 인사하게. 내 딸이네.

박세아

안녕하세요, 박세아라고 합니다.

이주호

아, 안, 안녕하세요.

이주호는 박명주에게서 딸이 동행할 것이란 언질은 받았었지만, 정말 좁은 기내에서 첫인사를 나누게 될 줄은 몰랐다. 당혹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못해 얼굴에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으로 모자라 땀을 비 오듯이 흘렸다. 뉴스 기사로 종종 접했지만, 박세아는 실물이 훨씬 더 예뻤다.

한편, 당혹감을 느끼는 건 박세아도 다를 바가 없었다. 골프 정도라면 국내에서도 아주 손쉽게 통제된 코스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굳이 전용기까지 타고 먼 거리를 비행한다는 게 달갑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러는 동안 유이태에게 어떤 일이라도 생긴다면, 곁을 지키지 못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세아는 괜히 마음이 흔들려 말을 흘렸다는 생각에 후회가 컸다.

박명주

여긴 일전에 내가 말했던 생물학자야. 아주 똑똑하신 분이야.

박세아

네, 그렇게 보이시네요.

그래도 세아는 상대가 무안하지 않도록 미소를 잃지 않았다. 어쨌든 오늘 자신이 부탁받은 건 이주호의 사람 됨됨이를 보는 거였으니까.

이주호

가, 감사합니다.

박명주

오늘을 위해 내가 그간 공부를 많이 했다네. 듣자 하니 우리 선생께서 연구하는 분야가 세포와 관련된 것이라고 하더군. 그 세포라는 걸 이용해서 노화도 막을 수 있다고?

이주호

네,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주호는 자신의 전문 분야가 거론되자 눈에 빛을 발하며 기분 좋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항산화 물질을 생성하는 세포를 인위적으로 합성하는 기술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어려운 이야기를 여러 가능성을 두고 전개하는데, 마치 앉은 자리에서 논문 한 권을 바로 떠드는 모양새였다. 세아는 그런 주호의 모습에 질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얼마나 자신의 학문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모습은 자신의 남편 유이태와 많이 닮은 것 같다는 생각에 경계심이 조금 옅어지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무서운 건 박명주였다. 그는 실제로 이주호를 만나기 전에 그의 논문을 직접 읽고 모든 내용을 소화하고 있었다. 관련 전공자도 아니고, 공부를 따로 해왔던 것도 아닌데, 오로지 이주호의 논문을 제대로 읽어보고자 며칠에 걸쳐 관련 서적들을 읽어가며 공부를 해왔던 것이다.

박명주

그렇다면 타인에게 수혈을 받는 행위는 쓸모가 없다는 말인가? 난 그게 꽤 가능성이 있다고 봤었는데?

이주호

혈장 수혈을 말씀하시는군요. 실제로 해외에서는 한 갑부가 직접 자신의 육체로 실험을 한 적도 있었죠. 물론, 혈장 수혈은 인체에 다양한 성분과 기회를 제공하긴 합니다. 다만, 그게 좀 한정적이죠. 그리고 조금만 과해도 인체에 부작용이 따를 수 있고요. 확실한 건 혈장 수혈로 인해 세포가 새로운 합성 작업을 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그저 이미 만들어져 있던 익숙한 영양소 중 일부가 조금 더 건강한 상태로 몸에 일시적으로 유입이 되는 정도입니다.

박명주

그럼, 자네가 생각하는 가장 현실성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주호

아무래도 약과 같은 형태겠죠. 그렇지만, 주사나 경구 투여되는 알약 같은 뭔가 본격적인 형태는 아닙니다. 그보다 더 단순하고 직관적인 형태. 뭐, 굳이 따지자면, 캡슐로 보호되어 있어 삼키는 알약이 아니라, 씹어 먹을 수도 있는 비타민 같은 거죠. 확실히 대중들도 그걸 더 선호할 테고, 제 이론대로라면, 구현하지 못할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세아 앞에서 씩씩하게 말을 내뱉는 이주호를 보며, 박명주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명주

그래, 바로 그런 형태지. 접근성이 좋은 형태이고 말고.

페퍼가 곧장 로다주에게 찾아가 치들의 말을 옮긴 건 로다주가 명확히 선을 그어주길 바라서였다. ‘동료를 믿지 못하는 것도 모자라 고작 상인의 말에 흔들리는 것이냐’는 질책을 받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선을 그어주면, 옆에서 지켜보던 치들이 찍소리도 못하고 도망치기 바쁠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페퍼 혼자만의 착각에 불과했다. 로다주를 만난 치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슬로프와 관련된 온갖 정황과 증거를 내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치들

그러니까 저도 처음에는 믿질 못했습니다. 그는 단 한 번도 셈을 어긴 적이 없었고, 항상 편의를 봐주던 좋은 친구였으니까요.

로다주

정말 이 서신들과 문서가 그의 침실에서 나온 것인가?

치들

그렇습니다. 제가 대장군에게 거짓을 고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페퍼

그런데 당신이 왜 그의 침실에 드나든 것이지?

치들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가 너무 제 편의를 많이 봐준 탓에, 딴에는 저도 보답하고자 그의 집을 찾아갔을 뿐입니다. 한데, 급히 떠났는지 문도 제대로 잠가 두지를 않았더군요. 그러니까 서신들을 발견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문이 열려 있어서 그저 혹시나 하고 현관문을 열어봤던 것이고, 혹시나 해서 침실까지 다가가 본 것뿐입니다.

페퍼

그렇다면, 그 내용물들 다 당신이 꾸민 짓일 수도 있겠군!

페퍼는 눈을 반짝이며 치들을 몰아세웠다. 그렇지만, 치들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다소 슬퍼 보이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게다가 말투는 차분하게 페퍼를 달래주는 듯해서 페퍼는 소름이 끼쳤다.

치들

유감스럽게도 그 자리에는 평소 그의 환자였던 ‘야야’도 함께였습니다. 그러니까 증인이 있다는 거죠. 어떤가요? 그가 말했던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존재하지 않고, 그는 적국인 서방의 이슬로프와 밀서를 주고받은 정황이 뚜렷합니다. 게다가 지금은 황제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피하기 위해 항구로 향하고 있죠.

페퍼

웃기지 마! 그는 사람들을 위해 더 좋은 약을 만들려고 남방으로 향하는 것일 뿐이라고!

치들

그것도 좀 이상하더군요. 동방에서 오던 중 배가 크라켄에 의해 난파되었다는 양반이 또 배에 직접 오른다? 뭐, 진짜 약 개발에 단단히 미친 자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그는 이미 대단한 약재들을 많이 발견하지 않았나요? 그의 청심환으로 건강을 되찾은 이들만 해도 이미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목숨을 걸고 배를 또 탄다? 아무리 믿고 싶어도, 너무 쉽게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이라 정말, 속아주는 것조차 힘들군요.

그렇게 그 길로 페퍼는 남쪽으로 말을 몰았고, 로다주는 중요 참고인이란 이유로 치들을 구속한 채 궁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항구 도시가 나타나기 전, 사막의 초입에서 페퍼가 유이태를 따라잡았다.

페퍼

역적, 허준은 당장 투항하라!

유이태

뭐? 페퍼? 내가? 역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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