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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한의약인조의 이명(耳鳴),
마음이 울자 귀도 울었다

글쓴이:   한동하 / 한의사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항전을 다짐했지만, 결국 47일 만에 한강 남쪽 삼전도(三田渡)에서 항복하고야 말았다. 인조는 청나라 황제 청태종 앞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함으로써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 바로 삼전도의 굴욕이었다.

인조는 병자호란의 패배와 삼전도의 굴욕에 이어 소현세자와의 갈등까지 겹치면서 소화 장애, 우울증, 불안 증세를 보였다. 또한 신하들에게 자주 화를 내며 분노조절장애까지 나타났다. 결국 이 모든 증상은 화병(火病)으로 이어졌고, 어느 날부터는 귀울림(이명, 耳鳴) 증상까지 나타났다. 인조는 자신의 증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전부터 귓속에서 매미 소리가 나곤 했는데, 이달 13일에는 왼쪽 귀에서 갑자기 종이 울리는 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 물 흐르는 소리는 가늘게 흘러가는 소리가 아니라 큰 물살이 급하게 흐르는 소리였고 종소리도 났다."(승정원일기. 인조 24년 1646년 10월 17일)

이러한 증상에 대해 신하들은 화(火)를 원인으로 보고 인조에게 먼저 한약을 처방했다. 처방된 약재들을 살펴보면 번열(煩熱) 증상을 치료하는 지모, 치자, 진피, 황백, 건지황 등이 활용되었는데, 이들 약재는 심화(心火, 마음에 쌓인 열)와 간화(肝火, 간에 쌓인 열)를 다스리는 약재들이었다.

그중 특이한 처방으로 ‘투이통(透耳筒)’이라는 처방이 있었다. ‘투이통’은 산초씨, 파두육, 석창포, 송진을 가루로 내서 밀랍과 섞은 후 대롱 모양으로 만들어서 귓속에 넣는 것이다. <동의보감>에는 “‘투이통’은 신장의 기가 허약해져 귀에서 바람 소리, 물소리, 종이나 경을 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거나, 갑자기 귀가 들리지 않는 증상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하루 한 번씩 갈아 주면 신기한 효험을 볼 수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인조에게 외이도염으로 인한 가려움증이 발생하면서 ‘투이통’ 처방은 중단되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의관들은 인조의 이명증을 치료하기 위해 화기(火氣)를 가라앉히는 데 집중했다. 특히, 도제조와 부제조는 “이번 이명증 치료에는 황백과 황련은 없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정도였는데, 황백과 황련은 화를 내리면서 염증을 다스리는 데 효과가 있는 대표적인 약재다.

또한 의관들은 “이번에 상초(上焦, 횡경막 위에 해당하는 부위로 심장과 폐가 위치함)가 막히는 증후는 오로지 화(火)가 왕성한 데에서 연유되었으니, 반드시 마음을 맑게 하고 생각을 고요하게 함으로써 군화(君火)와 상화(相火)를 진정시킨 연후에야 모든 침과 약이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승정원일기 인조 24년 1646년 11월 5일)라고 하면서 인조에게 마음을 차분하게 다스리기를 청했다.

침 치료도 함께 행했는데, 귀 부위의 혈자리와 경락을 따라서 침을 놓았다. 이명을 치료하는 혈자리는 침의(鍼醫)인 이형익의 주도 아래에 이문, 합곡, 중저, 후계, 신문, 태충, 내정, 임읍, 지음 등의 혈자리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혈자리는 오늘날에도 이명증 치료에 널리 활용되고 있다. 특히 신문은 심화(心火)를 다스리고 태충은 간화(肝火)를 치료하는 혈자리다. 인조는 침 치료에 상당히 만족스러워했다.

그런데 치료 중간에 인조에게 청력이 일시적으로 저하되는 이롱증(耳聾症)이 생겼다. 의관들은 방풍통성산(防風通聖散) 가미방과 당귀용회환(當歸龍薈丸) 등의 처방으로 꾸준하게 치료했다. 방풍통성산은 풍열(風熱)로 인한 다양한 이명과 난청을 치료하는 처방이고, 당귀용회환은 분노로 인하여 옆구리 통증이 있거나 잘 놀라고 경련을 일으키거나 헛소리를 하는 증상에 쓰이는 처방이다. 두 가지 처방 모두 크게 보면 화(火)를 다스리는 처방이다.

이명이 발병한 후 8개월 동안 꾸준한 침 치료와 한약 처방을 받은 인조는 이후 관련 병증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완쾌된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의 왕들은 천하를 다스리는 최고 권력자였지만, 정작 평온한 삶을 누릴 수 없었다. 하루도 쉬지 않는 끝없는 논쟁, 외척과 반대 세력의 정치적 압박, 그리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독살과 반란의 위험 속에서 살아야 했다. 이러한 극심한 스트레스는 곧 몸의 균형을 무너뜨렸고, 화병(火病)과 이명(耳鳴) 같은 질환으로 이어졌다.

선조, 효종, 영조 또한 이명으로 인해 괴로움을 겪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을 떠났다. 전란 중에도 국정을 운영해야 했던 그는 밤낮없이 신하들과 대책을 논의하느라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도 없었다. 이때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이명이 발생했고, 결국 선조는 말년까지도 이명에 시달리며 살았다.

효종 또한 명나라와 의리를 지키고 청나라에 복수를 다짐하며 북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과로로 인한 신경쇠약과 극심한 피로가 누적되면서 이명이 발생했다. 효종의 이명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으며, 만성 두통과 어지럼증까지 동반되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영조는 조선의 왕 중 최장수를 누렸지만, 노년에는 이명으로 인해 상당한 고통을 겪었다. 영조는 예민하고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보였으며, 분노조절장애까지 있었다. 실록에도 신하들에게 노발대발하면서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는 기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선조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경서를 많이 읽으며, 스스로 화(火)를 조절하려 노력했다고 한다.

결국, 조선의 왕들에게 이명은 단순한 신체 질환이 아니라, 무거운 책임감과 극심한 스트레스가 만들어 낸 시대적 질병이었다. 이는 현대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과로와 스트레스가 쌓이면 누구나 이명 증상을 겪을 수 있다. 따라서 이명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의 화(火)를 다스려야 한다. 마음이 울면 귀도 함께 울기 때문이다.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한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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