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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한의약조선시대 왕들의 직업병?
견비통(肩臂痛)과 오십견

글쓴이:   한동하 / 한의사

어깨와 함께 팔이 아픈 증상을 견비통(肩臂痛)이라 한다. 조선시대 왕들에게는 견비통이 많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고 지금으로 보면 어떤 병이었을까?

가장 먼저 견비통으로 고생했던 임금은 태종이다.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넘겨준 후 53세 무렵부터 어깨 통증에 시달렸다. 세종 즉위년에 어깨 통증이 나타나자, 영의정은 의관의 뜸 치료 대신 온천욕을 제안했다. 하지만 온천 행차에 거동하지 못할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뜸 치료와 온천욕은 당시 대표적인 온열요법으로 국소 부위의 혈액순환을 촉진하고 근육 이완과 함께 통증 억제에 효과가 있는 일반적인 치료법이었다. 그러나 실록에서는 태종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견비통을 치료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태종실록>을 보면 태종은 재위 기간에 사냥하다가 말에서 세 번이나 떨어졌다. 심지어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라고 말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말에서 여러 차례 떨어져 생긴 타박 손상이 태종 말년의 어깨 관절 손상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어깨는 관절의 퇴행성 변화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외부의 충격에 의해서도 통증이 유발된다. 태종의 어깨 통증은 회전근개 질환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오십견과 비슷한 증상으로 나타나지만 구분해야 한다.

숙종도 52세(숙종 38년)에 왼쪽 견비통으로 고생했다. <숙종실록>에 보면 “임금이 팔과 다리의 아픔이 있어서 곡지, 견우, 절골, 삼성 등 혈을 2월 초 2일로써 뜸뜨기를 시작하기로 정하였다.(숙종실록 숙종 38년 1월 24일)”라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뜸 치료를 곧바로 하지 않고 시술일을 통증이 나타난 날로부터 거의 10일 후로 정했다. 적절한 치료 시기를 놓쳐 증상이 악화되는 결과를 초래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왕에게 침을 놓거나 뜸을 뜨는 날짜는 길일을 택해서 정했다. 이와 관련해서 세종은 “침구(針灸)의 택일하는 법에도 역시 기(忌)하는 것이 많고, 믿기 어려운 글이 세상에 돌아다니니, 만약 이 방법에 의하여 꺼리는 날을 피해서 뜸을 한다면 혹 1년을 지나도록 뜸을 못 하는 수가 있을 것이다.”(세종실록 세종 7년 10월 23일)라고 하면서 의관들을 질책하기도 했다.

숙종은 침구 치료와 함께 피를 빼는 부항 치료를 겸했다. 숙종이 부항 치료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자, 도제조가 부항 요법은 <동의보감>과 <허임경험방>에도 나온다고 설득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숙종의 견비통은 약 4개월 동안 침, 뜸, 부항 치료를 지속하면서 차도를 보였다.

견비통으로 가장 고생을 많이 했던 왕은 바로 영조였다. 영조는 사저에 있을 때부터 어깨 통증이 간혹 나타났다. 그러다가 영조 44세(영조 13년)에 왼쪽 어깨에 통증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며칠 전 팔을 들어 옷을 입는데 갑자기 통증이 몹시 심해졌다가 오랜 뒤에 조금 풀렸다. 뭉친 담이 사라지지 않은 듯하니 증세가 오랫동안 이어질까 겁난다.”(승정원일기 영조 13년 2월 14일)라고 증상을 호소했다. 의관들은 담병(痰病)으로 진단했다.

<동의보감>에는 ‘팔이 아파서 들 수 없거나, 때로 좌우로 옮겨 다니는 것은 잠복한 담(痰)이 중완에 정체되어 비기(脾氣)가 돌지 못하여 위로 올라가 치받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팔이 아프면서 마비가 되거나 몸을 떠는 것은 모두 담음(痰飮) 때문’이라고도 했다. 한의약에서 담(痰)은 관절과 근육의 기능장애를 유발하는 병리적 물질로 인식되었다. 담병(痰病)이란 기혈순환에 문제가 생겨서 나타나는 관절이나 근육병을 이른다.

영조처럼 견비통에 다양한 치료를 시도해 본 왕도 없을 것이다. 영조는 침 치료, 뜸 치료와 함께 황랍1) 및 남성가루2)를 개서 만든 떡과 풀솜에 담비 가죽을 붙인 것으로 환부를 덮는 온열 치료를 시행했다. 뜸으로 인한 구창(灸瘡)3)에는 고약을 발랐다.

이외에도 의관들은 다양한 처방을 올리는데, 가장 자주 처방한 것이 바로 서경탕(舒經湯)과 육군자탕(六君子湯)이었다. 서경탕은 어깨 관절 질환을 치료하는 가장 대표적인 처방으로 요즘도 많이 쓰인다. <동의보감>에는 ‘기혈(氣血)이 엉기고 막혀 팔이 아플 때는 서경탕을 써야 한다.’라고 적혀있다. 육군자탕은 기혈을 보하면서도 담병을 치료하는 대표적인 처방이다.

또한 의관들은 담병에 묘피(猫皮, 고양이 가죽)가 비법이라고 하면서 권했다. 의관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환부를 따뜻하게 하고자 했지만, 날이 더워져 영조는 환부에 동물의 가죽을 덧대는 것을 힘들어했다.

영조는 결국 자신의 어깨 통증이 사라지지 않자 의관들을 책망한다. “침도 효험이 없고 탕제도 효험이 없다. 더구나 더위가 점점 심해지면 첫더위를 감당하기 어려우니 나의 생각으로는 침과 약을 모두 정지하고 증후를 천천히 지켜보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승정원일기 영조 13년 5월 24일) 영조는 모든 치료를 거부했고 의관들 또한 뚜렷한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난감했다. 그러나 영조의 어깨 통증은 하루아침에 좋아질 병이 아니었다.

6개월의 시간이 흘러 영조의 어깨 통증은 거의 잊을 만큼 안정이 되었다. 팔을 들어 올릴 때는 아프지 않았으나 뒷짐을 지려고 하면 불편함은 여전했다. 의관 권성징은 “어깨와 팔을 자주 굽혔다 폈다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굽혀져 펼 수 없거나 펴져서 굽힐 수 없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어깨 관절 운동을 권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관절운동을 권했어야 했다.

당시 왕들의 어깨 통증의 치료가 더딘 이유는 바로 운동 부족에 있었다. 왕들은 용포를 입고 벗는 것, 망건을 쓰고 벗는 것, 세안까지 모두 내시와 궁녀의 도움을 받기 때문에 어깨 관절의 가동 범위 내에서조차 움직임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회복이 더뎠다.

영조의 어깨 질환은 아마도 오십견이었을 것이다. 오십견은 어깨 관절의 관절낭에 여러 가지 이유로 염증이 발생해서 두꺼워지고 딱딱하게 굳어지면서 생기기 때문에 유착성 관절낭염이라고 한다. 흔히들 어깨가 굳는다고 해서 동결견이라고 하며, 통증으로 인해서 움직임이 제한되면서 더욱더 굳어지는 악순환을 겪는다.

오십견 치료의 핵심은 온열 자극과 스트레칭이다. 온열 자극을 통해서 관절낭을 유연하게 해 주면서 동시에 스트레칭으로 관절 가동 범위를 늘려주면 대부분 1년 안에 좋아진다. 의관들의 오십견 치료는 적절했지만, 다만 왕들의 운동 부족이 문제였던 것이다. 조선시대 왕들의 오십견은 운동 부족으로 인해 치료가 더딘, 일종의 직업병이었다.

  • 1) 꿀벌의 집에서 꿀을 짜내고 찌끼를 끓여 만든 기름덩이
  • 2) 천남성(天南星)이라는 약재로 만든 가루
  • 3) 뜸 뜬 자리가 헌 것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한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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