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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여는 사람들한의약을 기반으로
세계 전통의약의 표준화를 이끌다
안상영 / WHO 본부 통합의료서비스국 기술자문관
한국한의약진흥원 안상영 책임연구원은 국제보건기구(WHO) 본부에 파견된 최초의 한의사다. 한의약의 가치를 세계에 알리며 한의약을 기반으로 전통의약 표준화에 힘쓰고 있는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건강한> 독자분들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보건복지부의 전통의약 활성화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WHO 본부 통합의료서비스국에 기술자문관으로 파견된 안상영입니다.
한국한의약진흥원은 2021년 전통의학 분야에서 국내 최초로 WHO 협력센터로 지정되었습니다. WHO 협력센터는 국제보건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WHO가 각 분야의 전문기관을 선정하여 조직한 국제적인 협력 기구입니다. 현재 80여 개국 800여 개의 WHO 협력센터가 전 세계인의 건강 유지 및 증진을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국내에는 한국한의약진흥원 외에 한국한의학연구원과 경희의료원 동서의학연구소가 WHO 서태평양지역사무처(WPRO)로부터 전통의학협력센터로 지정받은 바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세 기관 모두 인연이 있어 WHO의 업무를 추진하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잠깐 소개해드리자면, 저는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는 2008년부터 전문연구요원과 선임/책임연구원으로 근무했고, 2020년부터는 한국한의약진흥원에서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또, 경희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으며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협동과정 수업을 들었습니다.
덕분에 2012년 WHO 서태평양지역사무처에 파견 근무하던 당시 WHO와 식품의약품안전평가원의 생약연구과와 협력을 확대하는 기회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협력을 바탕으로 2016년 2월에 최초로 WHO 서태평양지역사무처와 식품의약품안전평가원 간의 한약 및 생약 분야의 업무 협약을 체결했으며, 이 사업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의사 중 최초로 WHO 본부에서 기술관으로 근무하시고, 세계보건기구 서태평양지역사무처에서도 근무하셨어요.
2012년 10월 WHO 서태평양지역사무처에서 첫 파견 근무를 시작했었는데요, 업무에 대해 고민하던 중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 한국한의약연감을 제작했던 것에 영감을 받아 WHO 서태평양지역 보건지표 개발 업무를 시작했어요. 2013년과 2014년에 두 차례 전문가 회의를 개최하고, DHIS21)를 활용한 보고 체계와 국가 프로파일 템플릿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프로젝트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WHO 본부로 자리를 옮겨야 했습니다. 본부에서 근무할 기회를 얻게 되어 감사한 마음이 컸지만 프로젝트를 끝내지 못한 아쉬움도 남았습니다.
그러던 중 아쉬움을 떨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2018 100대 핵심건강지표 국제참조목록(2018 Global reference list of 100 core health indicators (plus health-related SDGs)’의 추가 지표 부분에 세계 최초로 전통의약 지표 2개를 포함시킬 수 있었습니다. 2022년 하반기에는 여섯 개의 지역사무처와 본부의 모든 보건 지표를 종합하여 전통의약 지표 내부 보고서를 제작했고, 이를 바탕으로 2023년에 제3차 WHO 전통보완통합의학과 글로벌 설문을 개발했습니다. 이 설문을 기반으로 WHO 최초의 온라인 포털을 제작 완료했으며, 곧 공개할 예정입니다. 또한 설문 결과 보고서도 마무리 중에 있는데요, 내년 세계보건총회의 ‘WHO 전통의약 전략: 2025-2034’ 맞춰 출간할 계획입니다.
추가적으로 2022년 말에 제작된 내부 보고서도 다듬고 있으며, 내년 세계보건총회에 맞춰 최초로 WHO 전통의약 지표를 출간할 예정입니다.
WHO 본부 파견을 결심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WHO는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본부와 6개의 지역 사무처, 150개의 국가사무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은 1990년부터 WHO 본부의 전통의약 부서에 진출해 목소리를 내고 있었고, 2017년에는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WHO를 방문해 침구동인(鍼灸銅人)2)을 제막했습니다. 인도는 2016년 WHO 본부 전통의약부서와 업무 협약을 체결하며 해외에서의 전통의약 입지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인도의 총리가 2020년에 WHO 총장에게 인도에 글로벌 전통의약센터(GCTM)를 설치할 것을 제안했으며 2021년 4월 인도 정부와 WHO는 TF를 구성하고, 2022년에 공식적으로 업무 협약을 체결했습니다. 이런 움직임을 지켜보며 한의약의 세계적 입지를 다져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국내에서도 다각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보건복지부 한의약정책관은 WHO의 고유 업무인 국제 표준 및 규범 제정, 세계 전략 개발 등에 기여하고자 2015년에 WHO 본부 전통보완통합의학부서와 업무 협약을 체결했습니다. 해외 각국의 실정을 잘 알고 있던 저는 국가를 대표해 작은 목소리라도 뚜렷하게 내기 위해 ‘WHO 전통의약 활성화 지원’ 기술관 공개모집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WHO 본부 전통보완통합의학과에서는 어떤 역할을 하는지 소개 부탁드려요.
WHO에는 생애주기 보편적 의료보장실 아래 통합의료서비스국이 있으며, 그 아래 전통보완통합의학과가 있습니다. 전통보완통합의학과는 1976년에 전통의약과로 개설된 이후 업무 범위가 확대되면서 명칭이 여러 차례 변경되었으며, 2017년에 통합의학 부분을 추가로 맡게 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전통보완통합의학과는 주로 환자 중심의 생애주기별 전통보완통합의학이 헬스 케어 서비스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방안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일차보건의료에서 전통보완통합의료를 활용해 보편적 의료보장을 달성하는 것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저 또한 우리나라 보건소의 한의과 운영과 한의약건강증진사업에 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전통보완통합의학과는 과거 필수의약품국에 소속된 적이 있는데요, 중국과 일본의 기술력을 결합해 1990년대 초부터 2018년까지 한약 및 생약과 관련된 일체의 WHO 가이드라인을 제정한 바가 있습니다. 현재 통합의료서비스국은 국제 한약 및 생약 약전 개발을 논의하는 국제한약규제조화기구(IRCH)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국가 보건 시스템의 통합과 안전성, 품질 및 효과성 제고를 위한 지원에 힘쓰시고 계신데요,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하나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경우, 각국의 다양한 전문가와 WHO 내 여러 부서가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같은 프로젝트에 대한 평가와 스토리가 서로 다를 때가 많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10여 년이 지나서야 프로젝트의 결과가 나오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7년 WHO 서태평양지역사무처에서 ‘전통의약 국제표준 용어’를 출간한 이후, WHO 본부에 국제질병분류(ICD)에 ‘ICD-11 전통의약 챕터’ 개발을 제안했을 때입니다. 2009년 홍콩에서 열린 공식 회의와 2010년 WHO 본부에서 진행된 비공식 회의 이후 본격적으로 사업이 추진되었는데요, 수십 차례의 회의 끝에 2018년 ‘ICD-11 전통의약 챕터’가 개발되었습니다. 그리고 2019년 5월에 세계보건총회에서 최종 채택됐습니다.
하지만 이후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각자의 스토리가 생긴 것입니다. WHO ICD 담당부서는 자신들의 성과라고 말했고, WHO 전통보완통합의학부서는 전통의약 챕터이므로 자신들의 기술적인 기여도가 컸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WHO 서태평양지역사무처에 관여했던 이들은 사업의 시작이 2007년이라고 하는 반면, WHO 본부의 업무 협약 체결 당사자는 본부에서 추진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누가 성과를 냈든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우리나라가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한의)의 오랜 경험과 노하우로 ‘ICD-11 전통의약 챕터 개발’에 기여했다는 사실입니다.
세계 전통의약의 표준 가이드라인이나 규정은 어떻게 정해지나요?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먼저, 컨센서스(consensus), 즉 표준 용어 제정은 관련 분야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을 기반으로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ICD-11 전통의약 챕터가 이에 해당됩니다. 각국의 질병 체계를 바탕으로 전문가들이 이를 검토해 공통적인 사항을 정하고 여러 이견을 WHO 규정에 맞게 조정합니다. 한약 및 생약 가이드라인도 각국의 규제와 평가 항목을 바탕으로 협의하여 제정됩니다.
현재 개발 중인 ‘WHO 전통의약 전략: 2025-2034’의 경우, 2023년 세계보건총회에서 개발을 권고받아 초안을 작성한 후 2023년 11월에 전문가 회의를 거쳤습니다. 올해 4월에는 공개 검토, 6월에서 8월까지는 WHO 여섯 개의 지역 사무처의 검토를 받았습니다. 8월과 9월에는 WHO 전체 회원국 검토 회의가 열렸습니다. 상충하는 이견을 조율하며 수많은 초안을 작성했는데요, 10월 14일까지 최종본을 제출하고 2025년 1월에 WHO 집행이사회에서 내용을 검토한 후 5월에 열리는 세계보건총회에서 채택될 예정입니다. 이처럼 하나의 가이드라인이나 규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투명한 절차와 협의 및 조정이 필수적입니다.
임상 가이드라인의 경우에는 이를 전담하는 가이드라인 검토위원회(GRC)가 있습니다. 가이드라인 검토위원회는 여러 부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위원회에서 정한 임상연구 평가 방법에 따라 WHO 가이드라인으로 채택합니다. 아쉽게도 WHO 전체에서 전통의약 임상 가이드라인은 2023년에 출간된 ‘WHO guidelines on non-surgical management of chronic primary low back pain in adults’가 유일합니다. 그것도 WHO 본부의 ‘Ageing and Health’과에서 제정한 가이드라인입니다. WHO 전통의약 담당 부서에서는 아직 임상 가이드라인을 제정하지 못해 아쉽습니다. 한국한의약진흥원이 한의약표준임상진료지침 개발에 참여한 여러 전문가들과 WHO를 연계해 우리나라의 경험과 노하우가 WHO의 상황을 타개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WHO 본부에서 전통의약, 특히 한의약의 발전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요?
WHO는 전 세계에 150개 국가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데요, 2012년에 우리나라에 있었던 WHO 한국연락사무소는 문을 닫았습니다. 이는 우리나라를 수여국이 아닌 공여국으로 본 것이죠. 우리나라도 이제는 충분한 역량을 갖추어 단독으로 추진할 수 있는 사업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UN 기구를 통해서 추진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2019년 11월 스위스와 오만은 제네바에서 다자간 협의를 통해 ‘글로벌 보건과 평화 이니셔티브’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WHO와 보건 분야가 평화 전망을 개선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올해 1월 WHO 집행 이사회에서는 글로벌 보건과 평화 이니셔티브 로드맵을 채택하고, 5월 세계보건총회에서 관련 결정문을 채택했습니다. 이를 담당할 센터가 우리나라에 설치된다면 한반도를 비롯한 전 세계 평화와 보건 증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UN체계를 충분히 이해하고 UN과 우리나라가 모두 윈윈(Win-Win)할 수 접점을 찾아 지속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해주신 것 외에 한의약의 세계화와 관련된 주요 성과와 활동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한때 한의약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해외에 나가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중국과 미국에 거주했어요. 그러나 이제는 논문을 쓰는 교수와 연구자들이 한의약의 세계화에 더욱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의보감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시킨 한국한의학연구원과 등재 후에도 묵묵히 동의보감을 영어로 번역했던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한의약진흥원도 한의약 세계화 사업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는데요, 2020년에 한국한의약진흥원의 WHO 협력센터 지정을 추진하는 세계화전략팀에 합류했습니다. 팀원 모두가 WHO 본부, 서태평양지역사무처, 외교부와 연락하면서 노력한 결과, 2021년 1월 우리나라 최초로 전통보완통합의학 분야에서 WHO 협력센터로 지정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한의약의 세계화를 위해 한 팀으로 움직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앞으로 해외에서 한의약의 전망은 어떨까요?
2019년에 ‘한의약과 WHO의 협력기록’을 출간했었는데 그 소책자의 마지막 문단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WHO와의 협력을 이해하고자, WHO 조직, 회의 기록, 근무자, WHO 전통의약협력센터 등을 기록하고 사견을 기입하였다. 어쩌면 이 모든 정보보다 중요한 것은 한의약이 갖는 기술(technology) 그 자체, 그리고 이를 통한 문제 해결 능력이다. 국제 보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술만이 앞서 기술한 모든 것의 해결책이다. 핵심 기술을 확보하는 것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된다. 국내에서 먼저 이러한 분야의 연구, 지원에 나서야 한다. 인적 네트워크, 국제회의 참가, 협력센터 지정, 파견 이 모든 것은 표면적인 현상일 뿐이다.’
국내외 보건 문제가 무엇인지 명확히 인지하고, 이를 한의약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전망은 당연히 밝을 것입니다. 우리 한의약은 역사, 한의사, 한의대학교만 보아도 위상과 경쟁력은 최고 수준입니다. 전 국민의 의료보험에 한의약이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국민건강보험공단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한의약 관련 빅데이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런 환경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또한 보건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처에 한의약 담당 부서가 있으며 한국한의약진흥원과 한국한의학연구원 등 관련 기관까지 생각한다면 우리는 훌륭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양보다 품질로 승부하는 것이 전략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하기에 품질의 우위를 확보하는 방안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포부는?
가장 답하기 어려운 질문인데요, 왜냐하면 여태까지 계획대로 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웃음) 이상하게 들리실 수 있겠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은 덕분에 현재 스위스 제네바의 WHO 본부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세웠던 계획이 이루어졌다면 지금쯤 캘리포니아 어딘가에서 침을 놓고 있을 겁니다.
경희대학교에서 박사 논문을 쓰기 위해 연구실에 있을 때, 한국한의학연구원이 주최한 채용 설명회에 참석하게 되었어요. 그때 전문연구요원으로 군복무를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 전문연구요원 복무를 마치고 1년 정도 되었을 때 공공기관 근무 경험이 있는 전문가를 WHO 서태평양지역사무처로 파견한다는 선발 공고를 보고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WHO 서태평양지역사무처에서 근무가 끝나갈 무렵, WHO 본부에 최초로 자리가 났어요. 예상치 못한 일이었죠. 처음 가는 길이라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의지를 다지며 한 걸음씩 나아갔습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이를 즐기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계속 새로운 길을 탐구해 나가고자 합니다.
- 1) 국가 규모의 건강과 관련된 정보 추적 및 성과관리를 위해 보건 데이터를 수집한 국가 보건의료정보시스템
- 2) 침구학에 쓰이는 동(銅)으로 주조한 인체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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