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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한의약조선제일침 허임,
선조의 편두통을 치료하다

글쓴이:   한동하 / 한의사

조선의 14대 왕인 선조(宣祖)는 50세가 넘어 고질적인 편두통을 앓았다. 당시 어의는 허준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선조의 편두통을 허준이 치료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았다. 선조의 편두통을 치료한 의관은 따로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 선조 37년(1604년) 9월 23일의 기록을 보면 선조가 밤에 갑자기 편두통 발작을 일으켜 허준과 나눈 대화 내용이 나온다.

「상이 이르기를, “침을 놓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허준이 아뢰기를 “증세가 긴급하니 상례에 구애받을 수는 없습니다. 여러 차례 침을 맞으시는 것이 송구한 듯하기는 합니다마는, 침의들은 항상 말하기를 ‘반드시 침을 놓아 열기를 해소시킨 다음에야 통증이 감소된다.’고 합니다. 소신은 침놓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마는 그들의 말이 이러하기 때문에 아뢰는 것입니다. 허임도 평소에 말하기를 ‘경맥을 이끌어낸 뒤에 아시혈에 침을 놓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이 일리가 있는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병풍을 치라고 명하였는데, 왕세자 및 의관은 방안에 입시하고 제조 이하는 모두 방 밖에 있었다. 남영이 혈을 정하고 허임이 침을 들었다. 상이 침을 맞았다. 이후 약방이 문안하니, “평안하다.”라고 전교하였다.」

위 내용을 통해 허준은 침의(鍼醫)가 아니라 약의(藥醫)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허준은 처방에는 일가견이 있었지만 침을 놓지 않았던 것이다. 허준의 “소신은 침놓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小臣則不知針法].”라고 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어의나 의원들이 모두 침에 능통했던 것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침의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허임은 당대 최고의 침의로서 당시 침을 놓아 선조의 편두통을 치료한 어의였다. 이때 허임의 나이는 34살이었다. 이미 선조는 10여 년 전에 지방 순행을 할 때 허임을 동행하게 해서 3일 간격으로 침을 맞은 적이 있었다. 당시 허임의 나이는 20대 초반이었다. 허임의 침 실력은 누구보다 뛰어나서 선조는 침에 있어서 만큼은 허임을 신뢰했다.

출처: tvN '명불허전'

그런데 허임은 궁에서 침의로 있다가 고향인 나주에 내려가 있었다. 선조는 허임에게 침을 맞으려고 해도 허임이 곁에 없어서 불안해했다는 내용이 실록에 나온다.

<선조실록> 선조 35년(1602년) 6월 12일 기사를 보면, 「모든 의관은 경성에 모여서 상하(上下)의 병을 구제하여야 하는데, 의관 김영국, 허임, 박인령 등은 모두 침을 잘 놓는다고 일세를 울리는 사람들로서 임의로 고향에 물러가 있으나 불러 모을 생각을 하지 않으니 설사 위에서 뜻밖에 침을 쓸 일이라도 있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처럼 선조는 침을 맞을 일이 있을 때 허임을 곁에 두고자 한 것이다. 결국 허임은 다시 궁으로 돌아와 선조의 편두통을 치료한 침의가 되었다.

허임이 침의라는 직책을 버리고 궁을 떠나서 고향 나주에 내려가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의관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이었다.

허임은 1570년(선조 3년)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관노비였으며 모친은 사노비였다. 허임은 노비의 자식으로 천한 신분이었다. 어려서 부모의 병환을 고치고자 의학에 뜻을 두어 침의가 되었는데, 허임의 침구 실력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출신 성분 때문에 많은 핍박을 받은 것이다.

허임은 선조가 승하하고 나서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광해군에 이르러서도 허임이 내의원으로 들도록 하교를 했다. 그러나 허임은 여러 번의 전교를 거절하고 궁으로 올라오지 않았다. 신하들은 허임이 무례하다고 말하며 잡아서 국문해야 한다고 했지만, 광해군은 선왕 때 공이 있었다는 이유로 벌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지방 관직을 여러 곳 맡겼다.

출처: tvN '명불허전'

허임의 침법은 현재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으로 남아 있다. 침구경험방은 1644년(인조 22년)에 자신의 침구경험을 집대성한 책이다. 허임의 당시 나이는 75세였다.

허임은 침구경험방 서문에 ‘감히 옛사람들의 저술에 견주려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일생 동안 노력하여 마음으로 얻은 것을 차마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을 보는 자가 마음을 쏟는다면 급한 환자를 구하고 목숨을 살리는 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적었다. 자신의 침법이면 죽을 환자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과 함께 겸손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침구경험방>이란 제목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바로 ‘경험’이란 단어다. 허임이 기록한 침구처방은 모두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기존의 침구 서적을 짜깁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병증이 망라되어 있지 않지만, 기록된 내용들은 경험에 의한 것으로 모두 치료적인 가치가 높다. 따라서 허임침법은 현재 많은 한의사에 의해서 그 치료적 효과가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

허임침법은 조선의 전통적인 침법이라고 할 수 있다. <침구경험방>은 중국이나 일본의 침법과도 비교되어 당시 ‘조선의 침법이 최고’라고 하는 근거가 되었다.

조선침을 대침(大鍼)이라고 한다면 현대의 침을 보통 호침(毫鍼)이라고 한다. 조선침은 침자극, 즉 통증이 심했다면 현재의 침법은 가급적 통증 자극을 줄이고자 한다. 호침은 조선의 침에 비해서 가늘고 침관을 사용해서 피부를 빠르게 뚫고 들어가기 때문에 통증이 적다. 아마도 환자의 치료적 인내심과 치료 방법의 선호도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또한 지속적인 자극을 주기 위해서 전침 자극술을 이용하기도 하고 침습적인 침자극 대신 경피자극술의 일환으로 전자침이 개발되어 있다. 뜸 또한 연기가 나지 않는 무연뜸과 전자뜸이 개발되어 있다. 이처럼 현대의 침구술은 간편함이 보편화되어 있다.

현대적인 침구술의 발달과 변화는 ‘자극’이라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혈자리를 선택하는 능력과 보사법(補瀉法) 등의 자극술은 전기적인 자극이나 그 어떤 현대적인 기술로 흉내 낼 수 없다. 기계적인 자극은 인간의 손에서부터 전해지는 미세한 자극을 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대에 있어서도 허임과 같은 전통 침법을 버릴 수 없는 이유다.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한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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