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민진, 사진. 전경민
저출산 고령화 현상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선진국에서 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유럽이나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은 고령화가 천천히 지속됐고, 오랜 시간 이 문제를 고민해 온 만큼 시간을 들여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했다. 하지만 세계에서 유례없이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한국은 이를 대비하기 위한 시간이 부족한 실정이다. 아직까지 체계적인 시스템이나 인식이 자리잡지 못한 이유다. ‘한의약 건강돌봄 사업’은 이처럼 아직은 부족한 한국의 고령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는 대표 시범 사업 중 하나다. 새안산한의원의 김영남 원장은 이 시범 사업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지역의 대표 방문진료 한의사로 꼽힌다.
매주 화요일 오전, 김영남 원장은 아침 일찍 한의원에 들렀다가 바로 인근의 환자 집으로 향한다. 익숙한 걸음걸이로 집 안으로 들어오는 그를 보고 환자의 얼굴에서 숨길 수 없는 반가움이 새어 나온다.
매주 화요일 오전, 김영남 원장은 아침 일찍 한의원에 들렀다가 바로 인근의 환자 집으로 향한다. 익숙한 걸음걸이로 집 안으로 들어오는 그를 보고 환자의 얼굴에서 숨길 수 없는 반가움이 새어 나온다.
“아이고, 잘 왔어요. 자, 이리 앉아요. 뭐 간식이라도 좀 줄까? 여기 바나나 좀 먹어요. 감자전도 해 놨어.”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환자가 식탁과 부엌을 분주히 오가며 각종 간식을 챙긴다. 당황스러울 법도 하건만 김영남 원장은 익숙한 표정이다. 바나나와 초콜릿을 한아름 안겨주고 환자가 방으로 들어가자, 김 원장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한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8회 정도 방문진료를 받으셨는데, 올 때마다 고맙다고 항상 간식을 챙겨주세요. 다리가 좀 아프고 소화도 안 된다 하시고, 요실금도 조금 있으셔서 침 놔드리고 부항 처방을 해드리고 있습니다.”
척추 협착증으로 처음 진료를 받을 때는 걷기도 힘들어 했다는 환자는 침을 맞을 때마다 경과가 좋아져 지금은 짧은 거리는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이 좋아졌다고 한다. 침과 부항을 맞으며 허리 통증과 두통, 소화불량 등의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에게 김 원장은 파스와 주사, 소화제까지 양껏 챙겨준다. 무료 방문진료는 개인당 1년에 6회로 제한돼 있기 때문에 다음 방문까지 짧으면 일주일, 길면 2주에서 한 달이 걸린다. 그런 만큼 김 원장은 한 번 방문했을 때 필요한 의약품을 최대한 챙겨주려 애쓴다.
김영남 원장은 지난해 4월 공중보건의를 전역하고 6월에 새안산한의원에 입사한 새내기 한의사다. 현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지만, 학생 때부터 방문진료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입사하자마자 방문진료를 시작했다. 보다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방문진료를 위해 사회복지사 학위와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그가 이처럼 방문진료에 진심인 이유는 유럽이나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과 달리 국내에는 ‘사회적 입원’이 많다는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입원이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생활이나 요양을 위해 병원에 입원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굳이 입원할 필요가 없는 질병이나 건강 상태임에도 사회적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입원을 하게 되는 경우죠. 일례로 선진국에서는 낙상이나 경증 치매를 앓는 환자는 의사나 간호사가 방문진료를 통해 돌봅니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 방문진료 체계가 잡혀 있지 않아 경증 치매, 낙상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한 환자도 요양원·요양병원에 입원하는 게 현실입니다.”
통계에 따르면 국내에서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입원하는 환자의 약 30~40%가 사회적 입원에 해당한다. 즉 선진국에서는 굳이 입원하지 않고 방문진료를 통해 치료해도 되는 환자가 국내에서는 제도와 시스템이 부족해 많은 비용을 지불해 가며 어쩔 수 없이 입원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추세로 보면 앞으로 고령인구가 더욱 늘어날 것은 자명하다. 그런 만큼 ‘한의약 건강돌봄 사업’의 정식 사업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김영남 원장의 생각이다. 더불어 한의사로서의 보람과 취약계층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도 방문진료가 절실하다.
“한의약 자체가 노인 질환이나 통증 완화 측면에서 큰 효과가 있습니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이 가장 우선적으로 원하는 건 완치가 아니라 통증 완화거든요. 이런 측면에서 한의약이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방문진료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들도 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 중에 항상 소화불량으로 고민하시던 분이 있습니다. 몇 달째 소화불량으로 한의원을 찾아오셨는데, 방문진료로 집에 가보니 냉장고에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음식들을 그대로 두고 드시더라고요. 음식을 정리해 드렸더니 이후로 속이 편안해지셨다고 하더군요. 방문진료를 가지 않았다면 아마도 지금까지 소화불량으로 고생하고 계셨을 겁니다.”
김영남 원장은 방문진료를 하면서 한의사로서 사명감과 보람을 크게 느끼고 있다며 만족감을 표했다. 방문하는 집마다 환대해 줄 뿐만 아니라 한의원에서처럼 행위별 수가제가 아닌, 포괄 수가제로 진료비가 책정되기 때문에 소신껏 진료가 가능하다. 방문진료를 갈 때마다 환자의 증상이 눈에 띄게 좋아지고, 환자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면 한의사로서 기쁨과 보람이 배가된다. ‘한의약 건강돌봄 사업’으로 국내에서 방문진료가 첫발을 내딛었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는 많다. 김영남 원장이 현장에서 느낀 가장 큰 문제점은 한의약 수가 문제와 환자가 부담해야 할 본인 부담금이다.
“한의약은 방문진료에 있어서 양방보다 훨씬 다양하고 효과적인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수가가 의사보다 낮아 한의사들의 참여율이 낮은 상황이에요. 수가를 의사와 비슷한 수준으로 높이기만 해도 더 많은 한의사가 참여할 거예요. 더불어 본인 부담금의 경우 기본적으로 기초생활 수급권자나 의료 수급권자들은 지자체에서 진행하는 무료 방문진료가 끝나면 본인 부담금이 5,000원 정도 들어가는데, 딱 이 금액이 마지노선 같습니다.”
기초생활 수급권자의 경우 본인 부담금이 5,000원 정도라면 방문진료를 계속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문제는 애매하게 기초생활 수급권자에 들어가지 못하는 차상위 계층이다. 이들의 경우 회당 본인 부담금이 30,000원가량으로 크게 늘어난다. 이 정도 금액이면 차라리 택시를 타고 한의원을 방문하는 편이 낫기에 굳이 방문진료를 신청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기초생활 수급권자가 아닌 한 방문진료를 효율적으로 받기 힘들다는 뜻이다.
여기에 홍보가 부족한 것도 하루빨리 해결해야 할 과제다. 김 원장이 방문진료를 다니다 마주치는 요양보호사나 방문객 대다수가 방문진료라는 제도 자체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온라인 환경에 익숙하지 않은 어르신이 주요 서비스 대상자임에도 관련 정보를 온라인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는 것도 문제다.
“제도 자체에 대한 홍보는 물론 신청 가능한 한의원을 검색하는 시스템도 아직까지 제대로 구비돼 있지 않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 대한한의사협회나 한국한의약진흥원과 같은 단체에서 함께 고민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김영남 원장은 참여를 원하는 한의사를 위한 체계적인 교육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한의약 건강돌봄 사업’을 비롯해 방문진료에 대해 알고 있는 한의사도 구체적으로 이를 어떻게 신청하고, 이후 어떻게 방문진료를 운영해야 하는지 몰라 참여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는 것. 김 원장 역시 방문진료를 처음 시작할 때 신청 방법, 노하우 관련 정보가 너무 부족해 방문진료 한의사 커뮤니티를 찾아가며 진료 계획을 세운 경험이 있다.
나날이 심각해지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는 고령화 문제에 대해 김영남 원장은 ‘한의약 건강돌봄 사업’이 그 해답이 될 수 있다고 단언한다. 누구나 집에서 편하게 방문진료를 받을 수 있는 미래를 꿈꾸며, 그는 오늘도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