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민진, 사진. 이일영
노화와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찾아온다. 하지만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마지막을 준비하는 이들의 마음가짐은 각자가 처한 상황, 살아온 생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한의약 건강돌봄 사업’은 신체적 한계나 경제적 상황으로 병원을 자주 방문하지 못하는 취약계층을 돌보고 그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실시하는 사업이다. 대전 수민한의원의 임재덕 원장은 방문진료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처음 방문진료가 시작된 2021년부터 이 사업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왕성하게 참여하고 있다.
임재덕 원장이 운영하는 수민한의원은 다른 곳보다 조금 이른 오후 5시에 진료가 마무리된다.
남들은 아직 퇴근을 준비하고 있을 시간, 임재덕 원장은 왕진 가방을 챙기고 부지런히 길을 나선다. 방문진료를 위한 여정이다.
“조금 늦으면 퇴근 시간에 걸려 제시간에 도착하기 힘듭니다. 그리고 환자분들과 약속한 시간보다 늦어지면 기다리시거든요. 러시아워에 걸리기 전에 얼른 가야 해요.”
구불구불 굽이진 골목을 지나 환자 집에 도착한 임재덕 원장은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며 진료를 시작한다. 방 안을 가득 채웠던 TV 소리가 점차 줄어들고, 그 자리에 신이 난 환자와 덤덤하지만 따스함이 느껴지는 임재덕 원장의 목소리가 들어선다. 언제 한번 밥이라도 한 끼 사줘야 한다는 환자의 말에 임재덕 원장이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손사래를 친다.
“아이고, 그걸로 아버님 맛있는 거 드셔요. 오늘은 어디가 좀 불편하세요? 누워보실까? 힘드시면 그냥 앉아서 받으실래요?”
익숙한 듯 서로 농담도 건네고 일상의 작은 소식들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이 마치 오랜 친구 같기도, 아버지와 아들 같기도 하다. 20회 넘게 방문진료를 계속 이어오면서 형성된 충분한 라포(rapport, 신뢰와 친근감으로 이뤄진 인간관계) 덕분이다. 꼭 자주 보는 환자가 아니라도 임재덕 원장은 환자를 대할 때 반드시 일상 속 작은 이야기들을 곁들인다. 그것이 환자에게 도움이 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방문진료를 신청하시는 분들은 병원에 입원할 경제적 여유가 없고, 스스로 거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혼자 살거나, 가족이 있어도 돌봄을 받기 힘든 분들이 대부분이죠. 육체적 고통도 문제지만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분들도 많아요. 그런 분들에게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무척 큰 힘이 됩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친근하게 다가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임재덕 원장은 2021년 ‘1차의료 한의 방문진료 수가 시범 사업’ 때부터 방문진료의 필요성을 느끼고 꾸준히 확대를 주장해 왔다. 지금까지는 구 차원에서 실시하는 복지 프로그램을 통해 방문진료를 나갔는데, 구 예산에 한계가 있어 잠시 중단된 적이 있다. 다행히 대덕구가 2023년 9월 보건복지부에서 지원하는 ‘노인 의료·돌봄 통합지원 시범 사업’에 선정되면서 방문진료가 다시 활기를 띠게 됐다.
“지금 다녀온 집은 드물게 환경이 좋은 곳이에요. 보호자도 계시고 생활환경도 좋고 무엇보다 환자 본인이 낫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거든요. 임재덕 원장은 평일에는 어김없이 퇴근 후 한 시간씩 방문진료를 나간다. 쉽지 않은 환경에서도 꾸준히 방문진료를 가는 이유에 대해 그는 “자연스러운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이야기한다. 노인 인구의 꾸준한 증가에 따라 노인 관련 의료 수요 역시 증가세에 있다. 하지만 직접 병원에 방문할 만큼 건강과 경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이들은 많지 않다. 한의약은 침이나 뜸 등 방문진료에서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이 많아 유리하다. 실제로 임재덕 원장이 방문한 환자들 중 많은 이들이 간단한 침 치료만으로도 경과가 드라마틱하게 좋아져 놀라움을 준 경우가 많았다.
“뇌경색 1개월 후부터 방문진료를 실시한 환자가 있었습니다. 우측 편마비로 계속 누워 계셨던 분인데, 2회차 치료 후에 팔을 움직였고 9회차에는 조금씩 걸으셨어요. 처음에는 살기 싫다고 밥도 안 드시던 분인데, 이제는 살아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골반 골절로 누워 계시던 90세 할머니도 있어요. 대퇴부 통증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주무셨는데, 1회차 치료받고 그날 너무 편안하게 잘 잤다고 제 손을 꼭 잡고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임재덕 원장은 자신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환자들이 이런 치료 경과를 보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적절한 시기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탓에 작은 치료에도 큰 경과를 보인다는 것. 불편한 부위에 침을 놓고, 주기적으로 찾아가 더 나빠진 곳이 없는지 관리해 주는 것이 방문진료의 전부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환자들의 삶의 질은 천지차이로 달라진다. 치료를 받는 환자 역시 임재덕 원장에게 완치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그날 밤에 고통 없이 잠들 수 있기를, 통증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어서 동네 산책이라도 나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아예 걷지를 못해 삶의 끈을 놓아버리려던 환자가 방문치료를 통해 삶의 의욕을 다시금 되새기는 모습을 바라볼 때면 임재덕 원장은 세상에서 다시 없을 보람과 기쁨을 느낀다. 한의사가 되길 잘 했다고 생각할 만큼 큰 행복감을 느낀 적도 많다.
“모든 한의사가 공감하겠지만, 환자가 정말 감사하다고 손을 마주 잡으며 고마움을 표할 때만큼 기쁜 순간이 없습니다. 특히 방문진료 환자의 경우에는 예후가 금방 좋아져서 그만큼 쉽게 보람을 느낍니다. 많은 한의사분들이 제가 느낀 즐거움과 기쁨, 행복감을 함께 느끼면 좋겠습니다.”
현장에서 직접 환자를 만나며 진료하고 그들의 애로 사항에 공감한 임재덕 원장. 그가 생각하는 한의약 건강돌봄 사업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사업 목표는 독거노인 혹은 취약계층 노인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삶을 영위하다가 집에서 돌아가실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업 관계자, 독거노인, 보호자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마지막은 집에서 편안하게 맞이하고 싶다고요. 저는 한의약 건강돌봄 사업의 궁극적인 목표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소의 비용으로 집에서 소중한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가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죠. 환자 본인을 위해서도 이런 시스템이 사회 전반에 자리 잡아야 해요.”
2025년이면 국민 5명 중 1명이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되고, 이 비율은 2035년 30.1%, 2050년 43%로 계속 늘어나게 된다. 그렇다면 늘어난 고령 인구는 모두 어디로 가야 할까. 요양원, 요양병원은 자리가 정해져 있고, 비용도 적지 않다. 그렇다고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병상이 여유로운 것도 아니다. 사회 시스템상 늘어나는 고령 환자를 병원이 감내할 수 없다는 뜻이다.
환자 역시 병원이나 요양원보다는 집에서 생활하기를 선호한다.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힘겹게 생을 유지하느니 집에서 마음 편하게 생활하다가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다는 이들이 많다. 따라서 임재덕 원장은 건강돌봄 사업을 확대해 집에서 합리적 가격으로 건강 관리를 받다가 편안하게 임종을 맞이하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울러 한의사의 위상 제고에도 방문진료가 효과적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방문진료는 한의사가 양의사보다 비교 우위에 있는 분야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직 시범 사업인 만큼 향후 확장 및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분야이기도 하죠. 많은 한의사가 방문진료에 적극 참여해서 1차의료에서 한의사의 역할을 극대화할 수 있다면, 건강돌봄 사업이 한의사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제고하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임재덕 원장은 아직 시범 사업에 불과한 건강돌봄 사업이 하루 빨리 정식 사업으로 채택돼 누구나 집에서 쉽게 방문진료를 받는 내일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