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백유상(한국한의약진흥원 기획협력실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교수)
언제부터인가 벌써 우리 나이가 이렇게나 되었나 하고 느낄 때가 있고, 거울을 보면서 혈기 왕성하던 시절은 어디 가고 웬 늙은이가 떡하니 쳐다보고 있나 하고 새삼 놀랄 때가 있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늙음의 기준은 젊어 보이기 위해 열심히 애쓰던 시기를 지나 심리적으로 이제는 어쩔 수 없지 하면서 체념하고 변화를 받아들이는 순간부터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체념했더라도 저 내면의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인간의 근본적 욕망을 완전히 잠재울 수 있을까.
현존하는 가장 온전한 상태의 조리서인 조선시대 《수운잡방》의 하편에는 오정주(五精酒)라는 술이 소개돼 있다. 정을 기르는 다섯 가지 재료로 만든 술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만병을 다스리고, 허한 것을 보하며, 오래 살게 하고, 백발도 검게 되며, 빠진 이도 다시 난다. 껍질을 벗긴 황정 4근, 천문동 3근과 송엽 6근, 백출 4근, 구기 5근을 썬 것을 섞고, 여기에 물 3섬을 부어 1섬이 되도록 졸인다. 또 멥쌀 5말을 여러 번 씻어서 곱게 가루를 내어 죽을 만들고, 차게 식으면 누룩 7되 5홉, 밀가루 1되 5홉을 앞엣것에 함께 섞어 넣는다. 여름에는 시원한 곳에 두며, 겨울에는 따뜻한 곳에 둔다. 3일 후 멥쌀 10말을 여러 번 씻어서 하룻밤 물에 담가 두었다가 통째로 쪄서 앞의 밑술에 덧빚어 술독에 넣었다가 익으면 쓴다.
병을 고치고 몸을 보하고 오래 살게 하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하겠지만, 백발이 검어지고 빠진 이가 다시 난다니 갑자기 눈이 번쩍 뜨일 일이다. 물론 과장이 조금 섞여 있는 표현이지만 많은 사람이 솔깃해할 효능이다. 다섯 가지 약재 가운데 황정은 비위를 보하면서 폐의 진액을 생하고 근골을 강하게 한다. 삽주 뿌리인 백출은 비위를 보하며 습을 없애고, 천문동은 폐로 들어가 열을 내리고 건조함을 없애니, 두 약재의 효능을 합하면 황정의 그것과 비슷하다. 송엽, 즉 솔잎은 기운을 원활하게 돌려주는 목적으로 보조적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실 여기서 주목할 약재는 바로 구기자다. 구기자나무의 뿌리는 지골피라고 따로 부르므로 원문에 나오는 구기는 열매인 구기자로 추정된다. 구기자는 간과 신장에 작용해 정기 또는 음기와 혈을 보한다. 즉 정기가 약해 눈이 침침하거나 관절이 시리고 몸이 쇠약해 소갈이 있으며 오랜 기침을 하는 경우에 다른 약재들과 함께 광범위하게 쓰인다. 종합해 보면 오정주는 비위를 도와서 기혈의 공급을 원활하게 하는 동시에 정을 보하여 노화를 방지하고 무병장수하게 하는 약술이라 할 수 있다.
오정주는 752년 당나라 때 편찬된 《외대비요》에 이미 기재돼 있어서 의학 분야로부터 유래된 약술에 해당한다. 우리나라 조선 초기에 간행된 《향약집성방》, 《의방류취》 등에는 황정주라는 이름으로 소개돼 있다. 치료 목적으로 개발된 술이지만 민간에서 많이 애용돼 주요 조리서에 기재된 것으로 보인다. 1680년께 쓰인 저자 미상의 조리서 《요록》에도 위와 동일한 주조법이 나오며, 덧붙여서 술이 다 익으면 맑은 것을 떠서 마신다고 했다. 현재는 경북 영주시의 고가에서 제조 비법이 전수돼 내려온다고 하며, 전통주의 하나로 개발돼 상품으로도 유통되고 있다.
지난 호의 글에서 잠깐 설명했듯이 우리 몸에는 순도가 높은 기가 갈무리돼 축적되는 정(精)이라는 것이 있으며, 정으로부터 생기는 정기가 충실해야 질병을 예방하고 오래 살며 정신을 맑게 유지할 수 있다. 구기자는 이러한 정이 잘 갈무리되고 정기가 제대로 역할을 하도록 돕는 효능을 가지고 있다. 가지과에 속하는 구기자나무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나무이고 약용으로 쓴다는 것도 널리 알려져 있다. 1800년대 초에 저술된 조리서인 《주찬》의 ‘조주방(造酒方)’ 편에 구기자로 담근 구기주가 나오며, 《동의보감》에 실린 구기자주도 이와 비슷하다. 그런데 《주찬》에는 또 하나의 구기주가 나오는데, 생지황을 함께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흰머리가 검어지고 잘 늙지 않으며 몸도 가벼워진다. 10월 임계일(壬癸日)이나 상해일(上亥日)에 동쪽으로 향한 구기자 2되를 따서 질그릇 병에 좋은 술과 함께 담아 두었다가, 세 이레 후에 생지황즙 3되를 넣고 고르게 섞어 밀봉해 둔다. 입춘 30일 전에 병을 열어 매일 따뜻하게 데워서 빈속에 한 잔씩 마시면, 입춘이 지나면서 수염과 머리가 검어진다.
앞에서 구기자가 정을 충실히 하는 효능이 있다고 했는데, 지황은 그러한 효능이 더욱 강하다. 지황은 생으로도 쓰지만 보통 아홉 번 찌고 말린 숙지황을 많이 사용한다. 역시 간과 신장에 작용해 정과 혈을 보하는 대표적인 약재이며, 구기자와 같이 써서 그 효능을 더욱 높일 수 있다. 《동의보감》에 나오는 경험오수주라는 술도 구기자와 생지황을 재료로 만들며, 담가서 마시면 흰머리를 검게 하고 몸을 가볍고 튼튼하게 만든다고 했다. 한편 구기자나무 뿌리껍질은 지골피(地骨皮)라고 하며 구기자보다 열을 내리는 효능이 조금 더 있다. 지골은 땅속의 뼈라는 의미로 구기자나무가 정을 보하는 성질이 있음을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구기자 대신 뿌리껍질인 지골피를 써서 약술을 만들기도 했다. 빙허각 이씨가 지은 《규합총서》에는 지골피를 사용한 구기자주 제조법이 나오며, 《주찬》에는 지골주가 나오는데 역시 생지황과 함께 쓰며 감국화를 추가했다. 감국화는 간의 기운이 잘 소통되도록 도와줘 결과적으로 열을 내리는 작용을 한다.
근골을 튼튼하게 하고 정수(精髓)를 보하며 늙지 않고 오래 살게 한다. 구기자나무 뿌리, 생지황, 감국화 각각 1근씩을 찧어 물 1섬으로 삶아서 즙 5말을 얻어 놓고, 찹쌀 5말로 밥을 지어 고운 누룩 가루와 함께 골고루 섞어 병에 넣고 봉하여 담근다. 잘 익어서 맑게 되면 하루에 3잔씩 마신다.
생지황 또는 숙지황이 정을 보하는 효능을 구기자보다 조금 많이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수운잡방》의 하편에는 지황과 찹쌀과 누룩을 섞어 담근 지황주가 소개돼 있으며, 《동의보감》에도 같은 내용이 기재돼 있어서 지황을 위주로도 약술을 담가서 애용했음을 알 수 있다.
간과 신장으로 들어가서 정을 보하는 또 하나의 잘 알려진 약재로 녹용이 있다. 특히 한국은 전통적으로 녹용을 애용해서 세계적으로 1인당 소비량이 가장 많은 나라다. 《주찬》에서는 녹용을 마와 함께 술로 마시면 정력이 약하고 소변을 자주 보며 눈이 흐린 것을 치료한다고 했다. 《동의보감》에서도 사슴의 뼈나 머리, 콩팥으로 술을 담가 먹으면 허약과 피로를 치료하고 기혈을 보할 수 있다고 했다.
지황과 녹용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우선 사상체질별 분류상 지황은 소양인 약재에, 녹용은 태음인 약재에 속한다. 구증구포하는 숙지황은 중국 원나라의 주단계라는 의학자가 주로 사용해 우리 몸의 정이나 음기를 보하고 허열을 없애는 데에 효과를 많이 봤다. 이에 비해 녹용은 이미 신장에 갈무리되어 있는 정으로부터 기운을 밖으로 펼쳐서 정기가 잘 작용할 수 있도록 돕는 약이다. 만약 소아가 선천적으로 발달이 늦다면 녹용이 들어간 처방을 조금씩 써서 발육을 도울 수 있다. 또한 녹용은 간 기능을 돕기도 하는데, 한의학에서 간은 생식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봐 여성의 각종 자궁질환에도 사용한다.
필자의 생각으로 한국인처럼 몸 관리와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들은 없을 것 같다. 음식을 먹을 때에도 해당 식재료가 몸의 어디에 좋은지 궁금해하고, 몸에 좋은 먹거리가 있다면 먼 곳이라도 찾아 나서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마실 거리와 먹거리는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수단이다. 약술도 약효 성분의 소화 흡수를 돕고 가까운 데에 두고 복용할 수 있다는 편리성은 있으나 만능의 통치약이 될 수는 없다. 정력에 무조건 좋은 것, 모든 병을 낫게 할 수 있는 것, 100세까지 오래 살 수 있는 것 등 그러한 약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책에서는 과장해서 검은 머리와 빠진 치아가 다시 난다고 했지만, 노화의 진행을 늦추고 건강을 유지하는 데 일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의미 정도다. 규칙적인 생활과 편안한 마음가짐 그리고 깨끗한 음식을 섭취하고 활력 있게 생활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건강을 지키는 지름길일 것이다. 과유불급이라 지나치게 약술에 의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끊임없이 일어나는 젊음에 대한 욕망을 쉽게 접을 수는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