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민진, 사진. 전경민
대한민국은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 2022년 기준 국내 65세 이상 고령 인구는 전체 인구의 17.5%지만, 2025년에는 20.6%, 2035년에는 30.1%, 2050년에는 40%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코앞으로 다가온 초고령화 사회 진입과 함께 대두되는 문제가 바로 공공의료 서비스다. 고령으로 거동이 힘들거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병원 방문은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다. 이에 지역사회 내 돌봄이 필요한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의약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의약 건강돌봄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경기도 부천 중동한의원의 김범석 원장은 한의약 건강돌봄 사업의 시작부터 함께하며 지역사회 공공의료의 파수꾼으로 거듭난 인물이다. 매주 이틀,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이며 방문 진료를 다니는 그의 여정을 따라가 본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김범석 원장은 아침 일찍부터 한의원을 나선다. 두꺼운 가방을 메고 골목을 누비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 도착한 곳에는 거동이 힘든 환자가 있다. 한의약 건강돌봄 사업의 대표 서비스인 방문 진료를 위한 여정이다.
“별일 없으셨어요? 상태는 좀 괜찮으셔?”
환자에게 친근하게 말을 건네는 김범석 원장의 말에 환자와 보호자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익숙하게 진료를 시작한 김범석 원장은 2021년 한의약 건강돌봄 사업이 처음 시작하기 전부터 부천의 허준봉사단이라는 단체에서 방문 진료를 다니며 무수히 많은 환자를 치료해왔다. 일주일에 두 번, 오전에 방문하는 환자가 적게는 3~4명, 많으면 6~7명이다. 대부분 집에서 한의원까지 거동조차 하기 힘든 환자들이다. 김범석 원장은 방문 진료를 시작하면서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공공의료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전한다.
“거동이 힘드신 분들이 집 안에만 계셔서 모르고 있을 뿐, 생각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다양한 질병으로 고통받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분들은 병원 방문 자체가 어려운 분들이라 공공의료 혜택을 받기 힘들어요. 중증 질환자도 많지만, 방문해서 의사가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상태가 호전되는 환자도 제법 있습니다. 이처럼 의료복지의 사각지대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서비스가 바로 한의약 건강돌봄 사업입니다.”
방문 진료의 대상자는 보호자나 요양보호사가 없으면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건강이 나쁜 경우가 많다. 실제로 김범석 원장이 방문하는 환자의 60~70%는 누워서 그를 반길 수밖에 없을 정도로 거동이 힘들다. 노인성 퇴행 질환으로 눈이 보이지 않는 환자, 파킨슨병으로 침대를 벗어날 수 없는 환자, 무릎 관절 퇴행으로 걸음이 힘겨운 환자 등 수많은 케이스의 환자들이 그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30~40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진료와 치료가 이어지지만, 이 진료가 환자에게는 희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김범석 원장은 매 진료마다 최선을 다한다.
“퇴행성 질환을 완치시키기는 힘들지만 침으로 고통을 완화하고, 관절이나 운동 기능을 조금이라도 회복시켜 주면 진통제를 먹지 않고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환자의 삶의 질이 무척 좋아집니다.”
방문 진료로 삶이 달라진 환자도 많다. 알코올 중독을 앓고 있던 한 환자는 직접 병원을 방문했음에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오랜 알코올 중독으로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탓인지 병원에서는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다. 한데 방문 진료를 통해 발바닥의 티눈이 걷지 못한 원인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저장 강박으로 집에 물건을 쌓아두던 환자가 방문 진료를 통해 라포(rapport, 상호 신뢰 관계)를 형성하고 마음의 문을 열어 스스로 집안 쓰레기를 치운 사례도 있다.
김범석 원장에게 개인적으로 가장 특별했던 환자는 지금도 방문 진료를 이어가고 있는 루게릭병 환자다. 루게릭병은 운동 신경세포만 선택적으로 사멸하는 세계적인 희귀 질환이다. 아직까지 원인을 모르고 치료법도 없어 완치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범석 원장이 오늘 방문한 환자 중 한 명은 50대라는 젊은 나이에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다. 화장실도 기어서 갈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던 환자는 주민센터 통합돌봄과 직원의 사례 발굴로 김범석 원장에게 한의약 진료를 받았다. 이후 사업 종료 후에도 방문 진료 시범 사업을 통해 치료를 이어오고 있다. 루게릭병은 호전되는 경우가 무척 드문 질병임에도 현재는 스스로 서고 걷는 것은 물론 앉았다 일어서는 등의 운동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호전됐다.
“루게릭병 진단을 받고 집에 누워 있을 때 제 소원이 목발을 짚고 집 밖으로 한 발짝만 나가보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컨디션 좋은 날은 교회도 가고, 당구도 한 게임 치곤 해요. 너무 감사한 일이죠.”
부천시 통합돌봄 선도 사업 중 방문 진료 사업은 3회로 마무리되지만, 루게릭병 환자의 경우처럼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방문 진료가 필요한 환자가 있으면 김범석 원장이 한의 방문 진료 시범 사업으로 연계해 방문 진료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환자들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받거나, 환자의 상태가 눈에 띄게 호전될 때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는 김범석 원장. 상태가 나아지는 환자들을 보며 사명감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방문 진료를 실시하고 있지만, 여건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다. 고령의 환자들이 많아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하기도 하고, 약속을 잊고 문을 열어주지 않거나, 환자의 상태가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기도 한다. 집 안에 있는 환자가 거동이 어려워 보호자가 문을 열어줄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2050년에는 전체 인구의 40%가 노인이 된다. 문제는 이들의 경제적 능력이 천차만별이라는 것. 수많은 노령 인구 중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 들어가 안정적으로 건강을 관리하며 노후를 보내는 이가 몇이나 될까.
“현재 우리나라의 공공의료 시스템으로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고령 인구를 모두 케어할 수 없습니다. 필연적으로 집에서 건강관리를 하다가 돌아가시는 분들이 늘어날 거예요. 이러한 변화에 의료계가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결국 각자 알아서 하라는 말밖에 되지 않습니다. 나날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1차 의료, 필수 의료에 한의사들이 직접 참여해야 합니다.”
한의약은 방문 진료를 비롯한 건강돌봄 사업에 제격이다. 일반 병원 중에도 방문 진료를 중점적으로 하는 재택 전문 병원이 있지만, 대부분 진료를 하고 지시서를 써주는 데 그친다. 하지만 한의약은 다르다. 한의사가 직접 방문해 침을 놔주고, 지속적으로 관리해 줄 수 있기 때문에 보다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더불어 김범석 원장은 바뀌는 시스템 안에서 한의사들이 발언권을 얻고 더욱 많은 역할을 하기 위해서라도 방문 진료에 활발하게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고령 인구를 대상으로 하는 의료 서비스는 앞으로 계속 늘어날 것입니다. 이 분야에서 한의사가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직접 참여해서 성과를 내고 경험을 쌓아야 합니다. 그래야 한의사들이 공공의료 분야에서 역할을 할 수 있어요. 앞으로는 1차 의료, 필수 의료에 방문 진료가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의 현실보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생각해 방문 진료에 적극 참여해 주세요.”
김범석 원장이 회장으로 있는 부천시한의사회에는 총 310여 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그중 35명이 방문 진료 사업에 참여해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는 의학계에서 참여한 의사들의 3배에 달하는 수치다. 한의약계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고령 환자의 행복한 노후를 위해 김범석 원장은 보다 많은 한의사들이 방문 진료에 적극 참여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