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백유상(한국한의약진흥원 기획협력실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교수)
우리가 보통 막걸리를 탁주라 하지만 막걸리가 아닌 탁주도 있다. 바로 이화주(梨花酒)라는 독특한 술이 그것이다. 이화(梨花)는 배꽃을 말하는데, 꽃을 재료로 쓰는 것은 아니고 배꽃이 막 필 무렵인 4월 중순 이후에 술을 빚기 때문에 이화주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화주는 술을 만들 때 물을 사용하지 않으며 밀이 아닌 쌀로 만든 누룩을 쓰고 다 익으면 마시지 않고 요거트처럼 떠먹는 것이 특징이다.
역사적으로는 《고려사》에 수록된 한림별곡 가운데 황금주, 백자주, 송주, 예주, 죽엽주, 오가피주 등과 함께 이화주가 언급되어 있어서 고려시대부터 사람들이 애용해 왔음을 알 수 있다. 1800년대 말까지 대중 사이에 이화주가 유행하다가 이후 점차 사라졌고, 경북 안동의 양반가 종택을 중심으로 가양주로 담가오다가 최근 연구를 거친 후 상품으로 개발돼 유통되고 있다.
이화주를 담그려면 우선 쌀누룩, 즉 이화국을 만들어야 하는데, 조선 초기인 1450년경에 전순의가 지은 《산가요록》에 그 방법이 자세히 적혀 있다. 참고로 《산가요록》은 채소, 수목, 약초 등의 재배법과 가축, 물고기 등의 생육법 등을 기재한 농서이자 다양한 조리법을 기록한 조리서다. 저자인 전순의는 세종 때부터 어의를 지내고 약식동원을 중시해 최초의 식치 전문서인 《식료찬요》를 편찬하기도 했다. 《산가요록》의 이화주 쌀누룩 만드는 방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음력 2월 초순경 쌀 5말을 물에 담가뒀다가 다음 날 고운 가루로 만들어 체에 거른다.
2. 가루를 반죽한 후 오리알처럼 만들어서 하나씩 쑥으로 감싼다.
3. 알들을 빈 가마니에 담아 온돌방에 놓는다.
4. 일주일마다 뒤집어 21일이 되면 알의 속을 꺼내서 부순다.
5. 부순 가루를 마른 상자에 보관하고 날씨 좋을 때마다 말린다.
배꽃이 필 무렵 드디어 술을 담그는데, 쌀 10말을 가루 내어 구멍떡을 만든 후 물에 삶아 바로 말린다. 말린 구멍떡을 조금씩 떼어서 술독 바닥에 넣은 후, 쌀가루 한 말과 쌀누룩 5되를 섞어서 구멍떡 위에 뿌리고 버무린다. 술을 담근 지 3~4일 후 발효되어 온기가 있으면 술독에서 꺼내 식힌 다음 다시 넣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화주는 음력 5월 15일에 개봉하게 되는데 맛이 달고 향기롭다고 했다.
《산가요록》 이후 이화주는 《수운잡방》(1540년경), 《음식디미방》(1670년경), 《온주법》(18C 말), 《주찬》(19C 초), 《우음제방》(19C 말) 등의 조리서와 주조 전문서에 수록됐고, 의서인 《동의보감》(1613년)과 농서인 《산림경제》(19C초)에도 소개됐다. 주조법은 거의 비슷하며, 구멍떡 대신 일부 백설기를 사용하거나(온주법) 쌀죽을 사용하기도(우음제방) 했다.
이화주의 쌀누룩을 만들 때 쌀가루 반죽을 오리알처럼 만들어 쑥으로 싼 후 띄우는데, 후대에는 쑥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누룩을 띄우는 방법도 《산가요록》에서는 가마니 짚으로 싸서 온돌방에 두었지만, 《주찬》에서는 시루 안에 솔잎을 깐 후 반죽 덩어리를 담고 시원한 곳에 둔다고 했다. 이와 같은 변화가 나타난 이유는 이화주 누룩을 만드는 시기가 음력 2월 초에서 배꽃이 피는 음력 3월 이후로 늦춰졌기 때문이며, 따라서 누룩을 띄우는 기간도 21일에서 7일로 짧아졌다. 아마도 이화주가 당시 대중화되면서 사람들이 간편하게 담그기 시작했을 것이며, 일반 막걸리처럼 평상시 자주 마시기보다는 더위가 시작되고 본격적으로 여름이 오는 계절에 서늘하게 열기를 식혀주면서 기운을 나게 하는 목적으로 애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의학에서 많이 사용하는 약재 중 하나인 쑥은 성질이 따뜻하고 맛은 쓰고 매워서, 아랫배와 손발이 차고 자궁이 약해서 나타나는 여러 질환에 광범위하게 사용한다. 이에 비해 솔잎은 조금 따뜻한 성질이 있기는 하나 풍과 습을 없애고 간의 기운을 보하여 관절통, 관절염, 습진, 불면, 시력 저하 등에 쓴다. 몸에 열기가 많아지고 날씨가 습해지는 초여름부터 여름까지 사용하기에 쑥보다는 솔잎이 적합하다. 일상에서 손쉽게 구하기에도 솔잎이 낫다. 전통적인 주조법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으나, 이화주의 계절별 용도와 편의성에 따라 보조 재료를 달리한 옛사람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혹 누룩용 반죽을 쑥으로 감싸는 것이 얼마나 의학적으로 효과가 있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하지만 《동의보감》에 나오는 출전이 속방(俗方)으로 표기된 민간의 술은 청주, 백화춘, 모주, 이화주, 자주, 홍소주 등 몇 가지에 불과하고 그 가운데 바로 이화주가 포함돼 있다. 《동의보감》에서는 이화주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빛깔이 희고 맛이 조금 취할 듯한데, 봄과 여름에 마시면 좋다. 《속방》 (탕액편·곡부·주)
이화주 담글 때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주로 만들어 왔던 밀누룩을 쓰지 않고 쌀누룩을 쓴 것은 쌀의 특성을 더욱 살리기 위한 것으로, 밀이 열을 내리고 갈증을 없애는 반면 쌀은 속을 따뜻하게 하고 소화 기능을 돕고 기운이 나게 하는 효능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조선 중기 이후에는 이화주의 구멍떡을 만들 때 멥쌀에 찹쌀을 섞기도 하여 우리 몸의 기운을 돕는 작용이 더 강해졌다. 《동의보감》에서 이화주를 봄과 여름에 마시면 좋다고 한 것은 아마도 활동량이 늘어나서 나른해지기 쉬운 봄철이나 덥고 습해서 몸이 무거워지고 정신이 흐려지는 여름철에 도수가 높지 않은 이화주를 먹어서 기운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보인다.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않은 옛날에는 특별한 사정 아니고는 살던 동네를 벗어나 먼 길을 여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친정을 떠나 시집온 며느리들도 마찬가지여서 수년간 또는 그 이상 고향 집에 한 번 돌아가 보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운 나쁘게 무섭고 엄한 시어머니를 만나게 되면 힘든 시집살이 속에서 남편 외에는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이 속으로 끙끙 앓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도 가양주로 이화주를 빚고 있는 안동 양반 집안들 사이에 전해오는 이야기 가운데, 딸을 시집보낼 때는 반드시 이화주 만드는 법을 가르쳐서 보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힘든 시집살이를 그나마 안쓰럽게 생각해 남들 모르게 도와주는 분들은 주로 시조부모였다. 그래서 며느리가 어른에게 잘 보이기 위한 목적으로 또는 감사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이화주를 정성껏 빚어서 시조부모에게 올렸던 것이다. 연세가 높은 고령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음식이나 술을 많이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화주를 조금씩 떠서 마시면 속에 부담도 적고 맛도 조금 달달하고 술의 도수도 별로 높지 않아 기분 좋게 취하는 느낌만 들 정도이니, 손주며느리가 얼마나 기특하고 예뻐 보였을까 싶다. 그 아껴주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어 힘든 시집살이를 버텨내게 해주었을 것이다.
이처럼 손이 많이 가는 탁주인 이화주는 평민 대중보다는 주로 귀족 양반집에서 담가왔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까지 전해지는 안동의 전통식 주조 방법도 책에 적혀 있는 것보다 훨씬 까다롭고 복잡하다. 조선 중기 이후 보편화되면서 일반 백성들에게도 널리 애용됐으나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의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 거의 사라져버린 탁주가 됐다.
나이 드신 분들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 중에도 술을 좋아하나 많이 먹지는 못하고, 또 건강을 생각해서 기운 회복에 보탬이 되는 술을 찾는다면 이화주가 제격이 아닐까 한다. 직접 담그는 방법도 간편하게 많이 개량되는 중이다. 끝으로 한 가지 제안한다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인 《산가요록》에 나오는 방법대로 쑥을 싸서 누룩을 만들어 빚은 원조 이화주를 다시 만들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혹시 쑥 빛이 들어 배꽃처럼 희디흰 이화주의 색이 바뀌지 않을까 걱정 아닌 걱정이 들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