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약 人
국내 최초 파란 눈의 한의사
라이문드 로이어 자생한방병원 국제진료센터장

글. 오주이 사진. 홍승진

오스트리아 출신의 라이문드 로이어 센터장은 국내 최초 서양인 한의사로 유명하다. 그는 1999년 한의사 면허를 취득해 24년간 한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국내에 외국인 한의사는 더러 있지만, 서양인 한의사는 지금까지도 그가 유일하다.

한국과는 언제 처음 인연을 맺었나요?

어려서부터 동양 철학과 무술, 불교 등 동양에 대한 관심이 컸습니다. 스물세 살에 잠깐이라도 동양을 방문해 경험해보자는 마음으로 여행을 계획했습니다. 1987년 당시 중국은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고, 일본은 이미 서양화됐고 물가도 비쌌어요. 그래서 선택한 나라가 한국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세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낯선 나라였습니다. 한 달에서 석 달 정도 기간을 잡고 방문해 태권도 등 여러 가지를 체험했습니다. 여행 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져서 6개월 정도 있었죠.

오스트리아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청년이 어떻게 한의학을 공부하게 됐나요?

여행 기간에 태권도 연습을 하다가 발목을 삐었는데, 도장의 원장님이 침을 맞으면 효과가 좋다고 하시더군요. 한약 냄새와 한약장 등 처음 방문한 한의원의 특별한 분위기가 낯설면서도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발목이 붓고 아픈데, 다른 부위에 침을 놓고 움직여봐라, 걸어봐라 시키는 거예요. 신기하게도 몇 번 걸으니까 괜찮아지더군요. 그렇게 한의약을 직접 체험하면서 관심을 갖게 됐고, 공부할 수 있는 곳을 알아보다가 대구에 있는 경산대(현 대구한의대)에서 외국인 입학에 대한 긍정적 답변을 들었습니다.

한국인에게도 어려운 공부인데, 외국인으로서 한의학을 공부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 말을 많이 들었는데, 오히려 저의 도전 정신을 자극했습니다. 게다가 당시 제가 오스트리아에서 하던 일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적성에도 맞지 않았던 터라 결심을 굳힐 수 있었습니다. 본격적으로 한의약을 공부하기 위해 모국으로 돌아가 반대하는 부모님을 설득해 7~8년간의 학비 지원을 약속받았습니다. 1989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한국어와 동양 철학, 한문을 공부한 후 1991년 경산대학교(현 대구한의대학교) 한의예과에 입학했죠. 공부는 전공과 관련 없는 수학, 물리학, 영어, 국사 등의 과목이 많았던 예과 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본과 들어가서는 한국어 실력도 늘고 의학과 관련된 전공 수업으로 오히려 공부하기가 수월했어요.

국내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한의사는 몇 명이나 있나요?

외국인 한의사는 몇 명 있지만, 서양인 한의사는 저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 부산에서 공부하고 있는 이란계 미국인이 한 명 있다고 들었지만, 아직까지 한의사 자격증을 가진 서양인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와 같은 외국인이 많이 와서 한의약을 공부하고, 그 기술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가서 의술을 펼치고 학생들을 가르치면 자연스럽게 한의약의 세계화가 이루어질 텐데 그런 부분이 다소 아쉽습니다.

24년간 한의사로서 수많은 환자를 만났는데, 기억에 남는 환자나 에피소드가 있나요?

제가 진료하는 환자 중 쉬운 환자는 거의 없습니다. 질환과 배경이 복잡하고 합병증도 많죠. 그래서 하나를 꼽기가 힘들어요. 현재 근무하고 있는 병원의 특성상 디스크와 관절 질환 환자가 가장 많습니다. 그 외에 오래전부터 외국인 난임 환자와 비만 환자를 진료하면서 관련 경험을 많이 쌓아 이 분야의 환자도 여전히 많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한의 진료 분야가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는 거예요. 예전에는 중풍 환자나 응급 환자도 많았는데, 지금은 허리, 무릎, 관절 치료가 한의계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70% 이상에 달합니다.

센터장님의 진료 철학 혹은 치료 원칙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모든 병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 있잖아요? 외국에서 일부러 한국으로 치료를 받으러 오는 외국인 환자는 복잡한 사연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로 허리, 관절 질환이 심각한 분, 비만이 심해서 살을 빼고 싶어 하는 분, 난임으로 계속 임신에 실패하는 분 등이 많기 때문에 아픈 부위나 질환만 보는 게 아니라 환자의 생활 환경, 가정, 스트레스 등을 두루 살펴 병의 원인과 합병증을 갖게 된 배경 등을 이해해야 합니다. 환자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도록 치료를 이끌어야 하죠. 대부분의 외국인 환자는 부작용이 거의 없고 안전하고 효과가 좋은 한방 치료와 한국의 의료 서비스에 높은 만족도를 보입니다.

지난해 한의약 세계화 및 해외 시장 개척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을 받으셨습니다. 한의약의 세계화, 특히 한약의 세계화를 위해 오랫동안 활동했는데 그간의 성과가 궁금합니다.

제 역할은 최대한 많은 외국인 환자가 한국에 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외국의 신문, 잡지 등 다양한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인터뷰를 진행하고, 러시아, 일본, 태국, 베트남, 브라질, 중동 등 여러 나라에서 한의약 강의 및 체험 등 다양한 홍보 활동을 진행합니다. 그 결과, 센터 설립 초창기인 17년 전만 해도 이곳을 찾는 환자가 거의 없었는데, 현재는 연간 약 2,500명의 외국인 환자가 방문하고 있습니다.
또 지난 5월에는 독일 교수 3명과의 공저로 최초의 한의학 독일어 도서를 펴냈습니다. 독일 의대생을 대상으로 한 교재인데요. 한의학에 대한 기본 개념부터 철학적 배경, 음양오행 등에 대해 설명하고, 『동의보감』을 바탕으로 한약에 대해 분석하고 현대의 약학적인 접근으로 약재 성분 및 효능 등을 분석했습니다. 한국에서 보험이 적용되는 구미강활탕, 소청룡탕 등 30가지의 약 처방을 소개했습니다.

한의약 세계화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장기적인 관점에서 양한방 통합이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15년 전부터 통합 교육을 대안으로 생각했습니다. 통합 의대를 만들고 통합 의사면허증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한의약의 위상이 올라가고 세계적 경쟁력도 갖추게 될 것입니다. 중국에서 통합 교육 과정을 통해 의사면허증을 발급받으면 미국에서 의사면허증 취득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하지만 한국의 한의사 자격증으로는 미국에서 시험을 치를 수 없죠. 한의약을 살리면서 국제적으로 우리의 면허증이 인정받게 된다면 더 많은 외국인이 한의약을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한의약에 관심을 갖는 외국인도 늘고, 한의약의 인기도 높아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