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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한의약왕들도 피해 가지 못한 감기,
왕들은 어떻게 치료했을까?

글쓴이:   한동하 / 한의사

조선시대 어의들은 매일 노심초사하며 왕의 건강을 살폈다. 신하들 또한 왕의 건강을 위해 팔도의 값진 제철 특산물들을 진상 받아 수라를 올렸다. 그런데도 왕들은 병에 걸렸다. 가장 흔한 현대 질환인 감기를 조선시대 왕들도 걸렸을까? 왕들의 감기는 어떻게 치료했을까?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 감기와 관련된 내용을 감기(感氣), 감모(感冒), 감풍한(感風寒), 상한(傷寒) 등의 단어로 살펴보았다. 많은 기록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경들은 경연(經筵)을 정지한다고 하여 나를 게으르다 하지 말라. 나는 약질로서 갑자기 대우(大憂)를 만나 어찌할 바를 몰랐었는데, 이른 봄 제사를 드리다가 심한 감기에 걸린 이후 잠시만 수고로워도 다시 발병하여 지금까지 낫지 않아서 여러 신하를 접견하지 못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만약 차도만 있으면 경연에 나가려 한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2년 11월 22일)

왕들이 감기에 걸리면 가장 먼저 경연(經筵)을 취소했다. 경연은 왕에게 유학의 경전과 사서(史書)를 강론하면서 시무를 논하기도 한 자리었다. 특히 연산군은 즉위년 다음 해부터 감기, 인후통, 비위 등의 문제로 오랫동안 경연에 참석하지 않았고, 신하들은 경연에 속히 납시도록 요청하기도 했다. 연산군 3년에는 감기로 인해 경연을 거의 한 달 내내 폐지했다. 중종 또한 잦은 감기와 해수(咳嗽) 증상으로 고생하여 경연을 정지했다.

놀라운 것은 왕실의 가장 중요한 행사인 종묘제례도 왕이 감기에 걸리면 연기하거나 참석하지 않았다. 연산군은 감기 때문에 목욕을 할 수 없다는 핑계로 제사를 지낼 수 없다고 했다. 성종이 감기에 걸리자, 대왕대비가 미리 나서 삼우제를 연기하라고 하기도 했다.

「대왕대비가 전교하기를 "주상이 명일에 친히 삼우제를 행하고자 하는데, 마침 감기 증세가 있으니 연기하라."라고 하였다.」
(성종실록, 성종 1년 2월 7일)

왕들은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했다. 세종은 중국 사신들이 열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사신 접대를 거부한 적이 있었다. 세종은 신하 안숭선에게 "사신의 행차에 열병(熱病)이 그치지 않으니 서로 접촉하면 전염될까 깊이 염려된다."라고 말하면서 이어서 "내가 풍한감기(風寒感氣)에 걸렸다고 하고 회피함이 어떨까 한다."라며 상의하기도 했다.(세종실록, 세종 13년 8월 12일) 당시에도 감기 환자와 접촉하면 전염이 된다는 것을 알고 꺼렸던 것이다.

의관들은 왕에게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무리하지 말고 항상 몸을 따뜻하게 할 것을 권했다. 광해군 때 기록을 보면 사헌부에서는 "지금은 절기가 이미 한겨울에 가까워 밤기운이 점점 매서워지므로 여염의 백성들도 감기에 걸린 자가 많은데, 더구나 성상께서는 조섭 중에 계시니 밤을 무릅쓴 거동은 결코 하실 수가 없습니다."라고 권고하면서 추운 겨울날 감기를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광해군일기, 광해군 4년 11월 17일)

그렇다면 왕들이 감기에 걸리면 어떤 치료를 받았을까? 왕들이 감기에 걸리면 가장 먼저 내의원 약방에서 진맥한 후 처방을 올렸다. 처방은 증상에 따라서 보통 3첩 정도를 올렸다. 1첩은 하루에 복용할 양이다. 2~3일마다 계속해서 진찰하고 처방을 반복하거나 변경했다.

감기에는 침구 치료보다는 대부분 약물치료가 시행되었다. 왕들의 감기에는 주로 삼소음(蔘蘇飮), 인삼패독산(人蔘敗毒散), 연교패독산(連翹敗毒散), 인삼강활산(人蔘羌活散), 구미강활산(九味羌活散), 화해산(和解散) 등이 처방되었다. 이들 처방은 요즘도 많이 쓰이고 있다.

한의약에서 감기는 풍한형(風寒形), 풍열형(風熱形), 시행감모(時行感冒, 유행성 감기, 독감) 등으로 구분된다. 삼소음은 두통, 발열, 기침, 가래, 흉민 등에 흔하게 처방되고, 패독산은 인후통이나 열감기에 주로 처방된다. 창독(瘡毒)이 심하면 인삼패독산에 연교, 금은화를 더하여 연교패독산을 처방한다. 몸살감기나 관절통, 근육통, 두통이 심하면 인삼강활산이나 구미강활산이 효과적이다.

영조는 삼소음을 복용하면서 간혹 열이 심하면 화해산(和解散)으로 변경했다. 의관 현기붕이 영조에게 "삼소음을 더 복용하셔야 합니다만 신열(身熱)이 있으시다면 화해산을 쓰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면서 처방을 변경하였다.(승정원일기, 영조 11년 4월 24일) 화해산은 오한발열 증상에 다용되는 소시호탕(小柴胡湯)을 말한다. 삼소음과 소시호탕에는 모두 인삼이 포함되어 있다. 영조는 감기에도 인삼을 즐겼지만, 고열이 있으면 인삼을 빼고 사삼(沙蔘, 더덕)으로 변경하기도 했다.

특히 영조는 감기 후 후유증으로 남은 기침에 사즙고(四汁膏)를 자주 처방받았다. <동의보감>에 ‘사즙고는 기침을 멎게 하고 담을 삭이며 화를 내린다. 배즙, 연근즙, 생무즙, 생박하즙 모두 같은 양으로 해서 여기에 설탕을 넣고 고르게 섞어 약한 불에 졸여서 고약을 만든다.’라고 했다. 사즙고에는 꿀이나 설탕이 들어가는데, 영조가 사즙고가 너무 달아서 잘 못 먹겠다고 하자 약방에서 덜 달게 해서 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숙종과 경종, 영조는 인동등차와 금은화차를 마시고 땀을 내기도 했다. 당시에도 열이 나면 땀을 내서 ‘발한해열’ 시키는 것이 일반적일 치료법이었다. 인동등과 금은화의 본 약재는 인동초(忍冬草)로 그 줄기를 인동등(忍冬藤)이라고 하고 꽃을 금은화(金銀花)라고 부른다. 인동초는 쉽게 구할 수 있어서 과거 민간에서도 감기 치료에 사용했다. <동의보감>에는 ‘요즘 사람들은 인동초를 사용하여 옹저(癰疽, 궤양)에 열이 몹시 나면서 답답하고 갈증이 나는 것을 치료하고, 감기 때 발산시키는 데 모두 효과가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인동등과 금은화는 소염, 진통, 해열 효과가 있는데, 요즘에도 염증성, 화농성 질환에 다용된다.

항간에 왕들의 감기약이라고 해서 쌍화탕(雙和湯)이 회자된다. 그러나 쌍화탕은 과로나 방사 후에 기혈을 회복시키는 처방으로 감기약이 아니다. 심지어 쌍화탕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 처방된 기록 자체를 찾아볼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감기에는 과로를 피하고 보습을 잘하면서 충분한 수분을 섭취하고 영양분도 잘 섭취해야 한다. 무엇보다 찬 자극을 피하는 것이 중요한데, 너무 추운 환경은 면역력을 떨어뜨리고 회복을 더디게 한다. 그래서 의관들은 추운 겨울날이면 왕이 거동을 삼가도록 권유했던 것이다.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한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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