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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한의약조선의 왕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질병, 종기
글쓴이: 한동하 / 한의사
조선의 많은 왕이 종기를 앓았다. 왕들에게 종기가 많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복잡한 국정으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와 기름진 음식, 운동 부족 등이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서 기혈소통에도 문제가 있었을 것이며 면역력도 좋았을 리 없다.
요즘 흔하게 사용하는 ‘종기(腫氣)’라는 한자어는 당시에는 흔한 글자가 아니었다. 대신 종기(瘇氣), 창종(瘡腫), 종창(腫瘡), 악종(惡腫), 정창(丁瘡), 옹종(臃腫), 옹저(癰疽), 장(瘴), 동(朣), 옹(癕) 등의 단어로 종기를 기록했다. 이 한자들을 통해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봤다.
조선의 3대 왕 태종은 36세(태종 2년)가 되던 해에 종기가 열 번이나 났다. 태종은 종기 때문에 온천욕을 하는 문제로 신하들과 다투기도 하였다. 종기는 반복이 되었고 결국 왕위를 내려놓을 때(태종 18년)까지 치료되지 않아 세종에게 서둘러 왕위를 넘겨줘야 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상왕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등에 큰 종기를 못 견디어 빨리 물러나려고 한 것이니….”(세종 즉위년 1418년 8월 14일)」라는 내용이 나온다. 세종 15년(1433년) 에 발행된 <향약집성방(1433년)>에도 종기에 해당하는 옹저창양문(癰疽瘡瘍門)이 8권에 걸쳐서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기 치료는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9대 왕 성종 때는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서 전문 관청인 치종청(治腫廳)까지 만들었으나 치종청에서조차 종기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다. 성종 24년에 세자의 얼굴에 종기가 났는데, 진주의 어느 부인으로부터 비방(祕方)을 구해 오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 그래도 세자의 종기가 낫지 않자, 중국에서 의원을 찾기까지 했다.
안타깝게도 내의원에서조차 종기를 치료할 자신이 없었다. 내의원 제조는 성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자의 얼굴에 난 종기가 오래도록 낫지 않는데, 우리나라의 의원은 문견이 넓지 못하여 약을 쓰지만 효험이 없습니다. (성종실록, 성종 25년 1494년 8월 12일)」 당시로서는 서글픈 현실이었다.
당시 작은 종기에 뜸이나 침을 놓아 좋아지는 경우도 있었다. 종기에 뜸을 뜨는 것은 종기가 난 부위에 빠르게 화농을 시켜서 농의 배출을 촉진하는 것이며, 침치료는 기혈순환을 촉진하며 통증을 억제하는 효능이 있다. 화농된 종기는 침으로 째서 파농(破膿)을 시키기도 했지만, 창구(瘡口)가 아물지 않아 애를 먹기도 했다. 문종, 성종, 중종 등도 종기의 창구가 아물지 않아 애를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거머리요법도 종기 치료법으로 활용되었다. 5대 왕 문종은 종기에 고약을 붙여서 배농을 시킨 후 거머리를 물려서 치료하기도 했다. 11대 왕 중종도 종기에 거머리요법을 활용했다. 중종은 오른쪽 겨드랑이에 심한 종기를 앓았는데, 민간에서 떠도는 외용제를 사용해보기도 하고 탕약도 써 봤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어의들은 도꼬마리1)를 태운 재와 돼지기름을 섞어 만든 태일고(太一膏) 등을 붙이고 거머리요법을 함께 시행했다.
거머리요법은 민간요법을 넘어 체계적인 의료시술법으로서 조선 선조 때 양예수의 <의림촬요>와 허준의 <동의보감> 옹저(癰疽) 문에도 시술법이 자세하게 나온다. 거머리요법은 혈액순환 촉진, 소염진통, 국소 부위 면역 억제, 새살 돋음 등의 효능이 있다. 현대에서도 종기나 염증성 질환의 치료에 다용되고 있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종기 치료에 대한 전문성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종기 전문서적으로 <치종비방(治腫祕方, 1559년)>, <치종방(治腫方, 1587년)>이나 <치종지남(治腫指南)> 등이 출간되었다. 또한 <동의보감, 1610년> 등에도 종기에 해당하는 옹저(癰疽) 편이 두껍게 편찬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종기 치료에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알 수 있다.
당시 한약이나 고약을 이용한 종기 치료 중의 하나는 바로 탁리소독법(托裏消毒法)이었다. 탁리소독법은 종기가 생기면 빠르게 화농 및 배농시킨 후 새살을 돋게 하는 방법이다. 고약(膏藥) 또한 탁리소독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탁리소독법은 중등도 이하의 종기에는 효과적이지만, 심한 종기에는 치료적 한계가 있었다.
또한 종기를 외과적으로 절개해서 치료하기도 했다. 그 당시 종기 치료를 잘해서 신의(神醫)로 불린 이가 있었으니 바로 백광현이었다. 백광현은 18대 왕 현종 때 태의원에 들어가 치종교수(治腫敎授)2) 역할을 했다. 백광현은 외과적인 처치에 능해서 현종의 목에 난 종기와 인선황후의 발제(髮際)3)에 난 종기를 침으로 째서 치료하기도 했는데, 종기 치료가 얼마나 어려웠으면 종기를 잘 치료한다고 해서 신의(神醫)라는 호칭을 들을 수 있었을까.
조선의 왕 중 종기로 가장 고생을 많이 했던 왕은 바로 22대 왕 정조다. 한때 정조의 종기를 민간의원인 피재길이 고약을 이용해서 치료하기도 했다. 그러나 종기는 다시 재발했고 종기를 앓으면서 열이 나고 의식까지 몽롱해졌다. 이들 증상은 고약이나 탕약으로도 잡을 수 없었다. 결국 수은이 포함된 경면주사(鏡面朱砂)4)로 만들어진 연훈방(煙熏方)5)까지 사용했지만, 정조는 끝내 패혈증으로 승하하고 만다. 종기를 앓은 지 18일 만이었다.
당시에는 패혈증과 같은 세균감염으로 인해 죽는 경우가 많았다. 종기는 황색포도상구균 등의 세균 감염에 의한 질환으로, 왕들의 생활패턴은 면역력을 떨어뜨려 감염도 쉽게 되었고 잘 낫지도 않았을 뿐더러 치명적인 결과까지 초래해 항생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요즘도 한의원에서는 종기를 고약이나 한약, 거머리요법 그리고 외과적인 처치를 통해서 치료한다. 이렇게 마음 놓고 치료할 수 있는 이유는 상처 관리를 철저하게 하고 이차적인 감염에 대비를 해두기 때문이다. 또한 궁극적으로 언제라도 항생제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도 종기를 많이 앓고 있지만 치명적인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유는 항생제 덕분이라고 할 것이다.
종기는 조선의 왕들을 괴롭히면서 역사를 뒤흔들었다. 만약 조선시대에도 항생제가 있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까.
- 1) 국화과의 한해살이풀로, 한자로는 창이자(蒼耳子). 또는 이당, 저이(猪耳)라고 부른다. 씨를 말려 약재로 사용한다.
- 2) 다른 의원들에게 종기 치료법을 가르쳐 주는 의원을 말한다.
- 3) 머리털과 목이 잇닿아 있는 곳
- 4) 주홍색 또는 적갈색이 나는, 황화 수은을 주성분으로 하는 천연 광물의 결정체(結晶體)로 한방에서 약으로 쓰기도 한다.
- 5) 수은 성분이 있는 경면주사를 태워 연기를 쬐는 종기 치료법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한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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