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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약설(說)레어템 한의약으로 이세계 정복
등장인물 소개

한의사 유이태생을 걸고 한의사가 되겠다는 목표로 정진하여 결국 젊은 나이에 유명한 한의사가 된 유이태. 운 좋게 재벌그룹의 사위 자리까지 꿰차게 되었지만, 어느 날 장인의 심부름으로 병원을 나서던 중 터무니없는 사고를 당하고 만다. 이후, 저승사자를 만나 그의 죽음이 급사, 객사, 요절, 미련과 억울함이란 조건을 충족하였다며, 지구가 아닌 이세계에서 잠시 생을 살 수 있도록 안내를 받는다. 현재는 이세계에서 허준이란 이름으로 활약 중이었으나, 치들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고 만다.

부관 페퍼성기사단 ‘아이어맨(Ironmen)’ 군단의 부관. 흑인 여성. 전쟁에서 부상을 입었으나, 유이태의 도움으로 병상에서 일어나게 된다. 이후 유이태에게 점점 호감을 느껴 주변을 맴돈다. 치들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힌 유이태를 돕기 위해 나선다.

치들약재상. 유이태로부터 청심환을 받아서 팔게 된다. 유이태가 등장하기 전까지 시장을 지배하던 자였지만, 이젠 유이태의 청심환으로만 수익을 내는 처지다. 당장 돈이 되더라도 유이태의 존재가 그리 달갑지가 않다. 유이태를 시장에서 몰아내기 위해 꾸민 계략이 성공하여 다시 시장의 지배자가 되었다.

박세아박명주의 장녀이자 유이태의 아내.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성격으로 고운 마음씨와 빼어난 미모를 지녔다. 식물인간 상태가 된 유이태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핀다. 박명주의 요청에 못 이겨서 골프 투어에 다녀왔으나, 아버지의 의중을 전혀 알 수가 없어서 자꾸만 의식하게 된다.

장인 박명주국내 재벌 서열 10위 안에 드는 대부호. ‘대박’ 그룹의 회장. 막대한 부로 못 가진 것이 없었던 그였지만, 죽음은 두려웠던 탓에 한의학계에서 유망주로 소문난 유이태를 사위로 맞이하여 그에게 불로초를 연구하게 한다. 현재는 사고를 당한 유이태 대신 생물학자 이주호에게 일을 맡기려고 계획을 꾸미는 중이다.

이주호평생 책상 앞에서 공부만 하고 살아온 생물학자. 박명주의 부름에 응해 골프 투어에 초대받고 다녀왔지만, 여전히 박명주의 속내는 알지 못한 상태다.

염라대왕유이태의 영혼을 이세계로 보낸 장본인. 현재는 유의태를 돕기 위해 저승에서 긴급회의를 연다.
Ep 8. 사람의 본성은 위급할 때 드러나는 법이니까
치밀한 치들이 짜놓은 판은 매우 정교했다. 치들은 이슬로프어로 적힌 서신들을 조작했고, 필체를 원본과 대조하고 판가름해 줄 관계자를 이미 매수해 뒀던 탓에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당연히 유이태의 환자였던 ‘야야’를 매수한 것도 치들이었으니, 명백한 증거라고 나온 모든 정황 증거와 물적 증거는 모두 치들이 만든 결과물이었다.

‘그러게, 재물을 다루는 이를 함부로 대하면 곤란한 게야. 세상의 모든 가치를 황금과 저울질할 줄 아는데, 감히 자극해서는 안 되는 게지.’
그는 작은 키에 못생긴 얼굴이었지만, 집요한 면이 있었고, 자신의 욕망을 관철하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반면, 유이태는 그런 셈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평생을 책상 앞에서 공부와 연구만 하거나 사람들의 병을 다루면서 보낸 이였다. 그의 행위 자체가 타인을 위하는 일이었기에, 주변에 적을 두거나 제어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 작정하고 판을 짠 치들에게 유이태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난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했었는데….
창살을 사이에 두고 유이태는 로다주와 페퍼를 만났다. 두 사람 모두 증거물이 명백하여 일을 되돌릴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특히 페퍼는 실성한 사람처럼 오열하며 창살을 쥐고 흔들어대긴 했지만, 그렇다고 유이태를 꺼내줄 생각은 전혀 하질 못했다. 그녀는 유이태를 신뢰하고 마음에 연정도 품고 있었지만, 그 전에 뼛속까지 기사이자 군인이었기에 명령에 위배되는 짓은 상상조차 못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페퍼보다 상급자이며, 귀족인 로다주가 현실을 보다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로다주는 페퍼를 돌려보낸 후 입을 열었다.

증거물이 자네 집에서 나온 건 사실이야. 그걸 뒤집을 수는 없어.

정말 답답하군요! 전 전혀 모르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난 거기에 대한 자네의 진심을 알고 싶어. 자네는 정말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사람인가?

네, 전 대한민국에서 왔습니다.

그럼, 어째서 탐험가들은 그런 나라가 없다고 확언하는 것인가?

에라, 이젠 모르겠다. 믿거나, 말거나! 난 다른 세계에서 왔으니까! 내가 살던 세계의 지도에선 오히려 너희들 나라가 없다고! 알겠어? 우린 서로 다른 차원에서 살고 있다가 만난 거야! 배신? 하고 싶어도 한들 소용이 없는데, 내가 왜 하겠냐!
로다주는 유이태가 흥분하며 날뛰는 동안 그의 눈과 호흡을 지켜보았다. 냉큼 잘라버린 경어는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의 태도에서 진실을 가려내고 싶을 뿐이었다. 문제는 유이태가 거짓말을 하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세계, 다른 차원이란 말은 너무 터무니가 없었다. 백번 양보하여 로다주는 믿어줄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런 말을 법정에서 다룰 수는 없었다.

자넨 분명 황제를 구했지. 그렇지만 당시 황제가 정말 큰 병을 앓고 있었는가에 대해서 의심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어. 그래, 황제가 평소 병상에만 드러누워 계셨던 건 아니었으니까 말이야.

아니, 말은 바로 해야지. 황제와 교황도 구했지! 그리고 페퍼도 구했고, 너의 병사들을 구한 사람도 나야! 난 이 나라에 와서 사람을 구하기만 했어. 신약을 만들어서 시민들에게 공급하고 건강을 돌본 것도! 그런데 어떻게 내게 이런 대접을 할 수 있냐고!

그 신약을 독점하고 있는 것도 너라서 문제야. 그걸 평소 달가워하지 않던 세력들이 이때다 싶어서 난리거든.

로다주 장군. 나도 오히려 당신에게 진심을 묻고 싶어! 당신은 나를 믿기나 해?
로다주는 맨손으로 마른세수하듯이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창살을 움켜쥐며 유이태에게 다가섰다.

허준, 잘 듣게나. 넌 나의 친구야. 자네가 페퍼를 살렸을 때부터 줄곧!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야! 그렇지만… 그 이전에 난 황제의 오른팔이지. 너를 돕고 싶냐고? 살리고 싶냐고? 물론, 당연하지.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판을 뒤집을 증거가 필요해. 한데, 자네는 지금 다른 차원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그걸 어떻게 증명할 텐가? 그런 건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질 않아. 그러니 정신 차려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야, 네 녀석이지!
유이태는 그대로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로다주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어쨌든 자신이 모함을 당해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는 건 이제 바꿀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 상태를 뒤집으려면, 더 확실하고 강한 증거가 있어야 했다.

더 절망적인 건 아마 조만간 네 녀석을 고문할 놈이 내려올 거라는 거야.

고문? 나를? 대체 왜? 내가 뭘 어쨌다고!

배신자에게 고문은 지극히 상식적인 조치야. 연락 배경과 내통한 방법을 알아내야 하니까. 그런데 이번 사건은 그런 배경이 그리 중요하지 않아. 그것보단 다른 게 더 큰 문제야. 바로 네가 독점으로 만들던 그 신약. 그 제조법을 너만 알고 있으니 그게 문제라고. 아직도 모르겠어? 자네는 많은 이들의 눈엣가시였어. 황제와 교황을 비롯해 나의 비호까지 받고 있었으니까. 말 그대로 갑자기 나타나서는 막대한 부를 이루지 않았는가? 놈들은 이미 칼을 뽑아 든 거야. 시간을 더 줘서 자네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는 걸 기다려주지도 않을 테고, 행여나 자네의 무죄가 증명되더라도 이번 기회에 재기할 기회를 부숴놓으려는 거라고. 신약의 정보가 모두에게 공유된다면, 자네의 가치도 그만하지 못할 테지. 이미 조사반에서는 네 집을 샅샅이 뒤졌어. 그런데 다행히, 거기서 나온 문서들을 누구도 해독할 수 없었지. 아마 네가 말한, 네 나라의 언어로 적어서겠지.

맞아. 그건 너희가 본다고 해서 알 수는 없을 거야. 내 세계에서 쓰던 내 나라의 말과 한자어와 영어도 혼재해 있을 테니까.

이미 명령은 떨어졌어. 시기의 문제일 뿐이야. 황제도 네 놈을 아낀다고.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건 황제도 내키지 않는다는 거야. 문제는 증거가 나왔으니, 합당한 조치를 해야만 다들 말이 없을 거라고. 알겠어? 이미 이건 정치적인 문제야. 그러니 고문할 놈이 내려온다는 건 비극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잘된 일이야. 어쨌든, 넌 시간을 버는 중이란 소리니까.
유이태는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새로운 약재를 구할 수 있단 생각에 신이 나서 말을 달리던 그였다. 이 세계에서는 보지 못했던 바다를 보고, 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접할 거란 사실에 들떴던 그였다. 무엇보다 그런 경험들 사이에서 집으로 돌아갈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기에, 지난 시간은 즐겁게 버틸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저 두렵기만 했다.

‘이쪽 세계에서 또 죽어버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 저승사자들이 날 원래 세계로 되돌려줄까? 정말? 만약, 그게 아니라면? 이후로 단 한 번도 나타나지도 않았고, 연락도 없었어. 저들을 어찌 믿을 수 있겠어? 아니, 이게 그저 다 꿈이라면, 죽기 전 마지막으로 꾸고 있는 꿈이라면… 이대로 정말 끝나는 걸 수도 있잖아!’
로다주는 무너져 내린 유이태를 보며 길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창살에서 손을 떼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단 한 마디를 남기고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정신 차려. 아직 신이 널 돕고 있는 거라고.
이주호는 여전히 꿈꾸는 기분이었다. 이후로는 정말 골프만 치다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코스를 돌 때마다 긴장된 자세로 박명주의 입을 바라보았지만, 박명주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당연히 박세아도 덩달아 말이 없었다. 이주호가 아무리 눈치가 없더라도 그는 이미 자신의 어떤 부분을 박명주가 확인했다는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다만, 그게 무엇인지 전혀 짐작이 가질 않았다.
한편, 박명주의 그런 묵묵부답은 딸인 세아를 향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세아에게 따로 이주호의 됨됨이에 대해 전혀 묻지 않았다. 아니, 그날 이후 따로 연락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니 세아는 자연스레 자신의 아버지와 이주호에 대해 떠올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대체 왜 그런 불편한 자리에 자신을 동행시킨 것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문제의 박명주는 그날 이후로 매우 바빠졌다. 이주호에겐 전혀 알리지 않았지만, 그를 중심으로 한 연구팀과 연구실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기획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는 어느 때보다 들떠 있었다.

‘그래, 노화를 막는 항산화 물질을 새로이 합성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면! 그 기술을 이용하여 모두에게 공급할 수 있는 형태로 약을 만들 수 있다면! 대박그룹은 문자 그대로 세계적으로 대박이 날 수 있는 거야! 그래, 일은 이미 무르익어 가는 중이니까….’
박명주는 결심을 굳혔다는 듯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내 사위, 아니, 유이태의 담당의라는 자에게 연락 좀 넣어. 내가 긴히 할 말이 있으니까 얼굴 보고 얘기하자고.
박명주는 의자를 창가로 돌려 뒤로 젖히며 몸을 눕혔다. 해가 높이 뜬 오후였지만, 차광막이 드리워진 회장실은 쾌적했다.

딸애 얼굴을 보고 참았지만, 산송장을 병실에 너무 오래 뒀어. 날이 이렇게 좋으면, 욕창만 더 생기지.
저승은 유이태 문제로 긴급회의가 열렸다.

다들 모였어?

네, 대왕마마를 뵙습니다.

대왕마마 만수무강하시옵소서! 만세, 만세, 만만세!

역시 제가 이번에 올린 상소문을 보셨군요! 그렇습니다, 이제 다른 죄목보다 환경을 어지럽힌 죄목을 더 크게 따져야 할 때가 왔습니다!

시끄럽고.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잘해.
염라대왕이 귀를 후비며 좌우를 둘러보았다. 다들 불만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그렇다고 누구 하나 불만을 표할 수는 없어서 답답함이 극에 달한 표정들이었다.

이것들, 표정들하고는! 알았어, 일단 환경을 어지럽힌 죄를 더 중죄로 다스린다. 좋냐?

역시 대왕마마이십니다!

현명하신 결단이십니다. 만수무강하시옵소서. 만세, 만세, 만만세!

그럼, 정말 됐고. 우리 새로운 프로젝트의 주역이신 유이태. 그 자식 지금 상황이 좋지 않다며?

네, 예견된 일이었습니다만, 주변의 적들이 그를 모함하여 곤란에 처한 것 같습니다.

이대로 둔다면, 그의 육신도 곧 화장될 거 같습니다.

원래 육신? 그건 왜?

장인이란 자가 평소 그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탓입니다.

대왕마마, 우리의 성군이시여! 이 일을 어찌할까요?

야, 그걸 고민하라고 너희가 있는 거지, 너희가 나보고 고민하라고 하면 저승이 제대로 돌아가겠냐? 내가 정말 너 때문에 돌아버리겠다!

그럼, 고민할 거 없이 지금 즉시 차사를 보내 혼을 제자리로 돌려놓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유이태야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지만, 유이태 지금 몸뚱이에 있던 원래 주인은 어찌 되겠냐? 모양 빠지잖아! 매끄럽지 못해. 안돼, 기각이다.

제게 묘책이 하나 있사옵니다. 다만, 원래 육신이 그때까지 자리를 지켜 줄지… 땅에 묻힌다면 문제 될 게 없지만, 그 장인이란 자의 성격상 다 태워버릴 듯하여 시간을 맞추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염라대왕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듯하더니 한 차례 빙긋 웃어 보이고는 다시 좌우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럼, 그 묘책이란 거, 그거대로 해보자. 대신 유이태 제대로 살아서 돌아온다, 안 온다. 내기나 해보자. 다들, 콜?
로다주가 돌아간 이후, 유이태는 뜬눈으로 꼬박 하룻밤을 보냈다. 옥에 갇힌 채로는 아무리 머리를 써도 한계가 있었다. 판을 뒤집을 증거를 찾기 위해서는 수족처럼 움직여줄 사람이 필요했다. 옥에 갇힌 채로는 당장 그저 치들이 수를 써서 증거를 조작했을 것이라는 추측만 가능할 뿐, 그 추측이 진실인지 확인하기 위한 절차를 밟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벽만 뚫어져라 바라보며, 머리를 굴려보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다시 아침 식사 배급이 나올 때쯤, 페퍼가 면회를 왔다. 유이태는 자신에게 동아줄이 내려왔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살로 다가갔다.

…식사를 하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장군에게 물었던 걸 똑같이 물어보겠어. 페퍼는 나를 믿어?

믿습니다. 믿지만….

믿지만, 황제의 명은 절대적이지. 그래, 이젠 알겠어. 다만, 나를 믿는다면, 치들의 뒤를 캐내 줬으면 해. 분명, 녀석이 모든 증거를 조작했을 거야.

증거 조작이요? 하지만, 증거는 이미 법관들이 명확하다고….

법관을 매수했을 수도 있잖아.

그럴 리가!

페퍼에겐 이 나라의 행정질서가 의심의 대상이 아닐지 몰라도… 이제 내겐 모든 게 의심의 대상이야. 페퍼는 내 옆에서 나를 봤잖아! 난 사람을 구하는 것 외에는 한 게 없어.

알겠습니다! 제가 당장 치들을 족쳐서….

아니, 그런 방법으로는 증명할 수 없어. 겁박으로 인한 자백은 전혀 소용이 없다고. 그보다는 일단 담당 법관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와 치들이 최근에 만난 적이 있다거나, 그의 주머니 사정이 나아졌다거나, 그런 부분을 캐내야 할 거야. 아, 그리고 현장에 ‘야야’가 있었다고? 야야도 마찬가지로 확인이 필요해.

…그렇군요. 증거를 쥔 사람들과 치들과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란 말씀이군요!

그래, 바로 그거야. 내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짜고 쳤다는 증거가 필요해. 문제는 난 지금 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 내 손으로는 밝혀낼 수 없다는 거야. 페퍼가 나를 믿는다면… 나를 대신해서 그들을 확인해 줘. 무리한 부탁이라는 걸 나도 잘 알아. 위험할지도 몰라. 로다주 장군의 말대로라면, 이건 이미 정치적인 문제라고 했어. 내가 풀려나길 바라지 않는 건 치들만이 아니라는 소리겠지. 그들이 페퍼를 방해할지도 몰라. 아니, 어쩌면… 페퍼의 목숨을 앗으려 들지도 모르지.
페퍼는 머리로 피가 몰렸다. 모함과 증거 조작이란 말에 단순히 치들을 닦달할 생각만 했었는데, 유이태의 이야길 듣고 있자니 훨씬 더 복잡한 일이었다. 대체 왜? 사람을 구하는 일에만 신경을 써온 이 남자를 누가 왜 해하려고 드는 것일까? 정치적 감각이란 전혀 없이 상명하복(上命下服)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아왔던 페퍼로서는 혼란스러운 이야기일 뿐이었지만, 그런 혼란스러움을 풀어내야 눈앞의 남자를 살릴 수 있다.

하하, 목숨이라고요? 누가 제게 감히 덤빌 수 있을까요? 그건 걱정 마세요.

그리고 가급적이면 모든 상황을 로다주 장군과 직접 공유했으면 해. 내게 살아남을 힌트를 알려준 게 장군이었어. 그도 법관을 비롯해 여러 귀족이 의심스러울 거야. 그렇지만 보는 눈들이 많으니 함부로 나서질 못하겠지. 그래서 내게도 말을 아꼈을 거야. 그러니 페퍼, 로다주 장군과 함께 해줘.

전 장군의 오른팔입니다. 항상 장군과 함께 해왔죠. 이렇게 말씀해 주시니 오히려 좋군요. 당연히 전 지금의 대화도 장군에게 보고할 겁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다만, 직접 보고 해야 해. 누구도 믿을 수 없으니까.
페퍼는 팔을 들어 가슴을 두드리는 것으로 자신의 의지를 보였다. 유이태는 창살 너머로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페퍼가 결의를 다졌지만, 치들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이미 시작 전부터 상대의 수를 미리 읽어둔 상태로 시작한 싸움이었다.

여기 어르신을 위해 챙겨둔 몫입니다. 다만, 지금 이 상자를 열어보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적어도 그의 목이 떨어지거나, 아님, 그가 옥에서 해를 넘긴 뒤에 열어보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지금 받으신 것만큼 그때 가서 더 드리도록 하죠.
치들은 자신의 연결고리를 누가 파고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리 수를 써뒀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정치적인 감각도 좋았던 탓에, 이미 귀족들 중 유이태를 달가워하지 않던 이들의 명단을 추려 직접 접촉하던 중이었다.

‘일을 그르치더라도 나 혼자 몰락할 수는 없지!’
그러니 페퍼가 기세 좋게 나섰지만, 시작점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건 로다주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대략적인 판은 읽었어도 상인을 우습게 봤다는 건 다를 바가 없었다. 수사는 반나절도 못되어 방향성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절망이 그들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을 때, 염라대왕이 던진 주사위도 소리를 내며 굴러떨어졌다.
궁에서 사람이 찾아와 로다주에게 급히 입궐할 것을 명했다. 왕비를 비롯한 가신들 몇 명이 갑자기 쓰러졌다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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